[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북풍한설이 매섭던 어느 겨울날 나는 알았다. 내 마음속에 행복과 그보다 더 많은 고통이 함께 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나의 삶에 향기가 나지 않는 것은 고통이라는 쓰디쓴 아픔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듬해 봄날, 나는 알았다. 추위가 깊을수록 봄이 우리곁에 가까이 와 있으며, 얼었던 땅을 비집고 꽃대가 솟아오르듯 아픔이 없이 꽃향기가 대지를 적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이에 바뀐 것은 계절뿐이었다.

지식과 정보는 흐르는 물과 같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오가며 교감토록 하고 교류의 물꼬를 만들어 준다. 국가와 민족들 사이에서도 지식과 정보는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소통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 진화의 궤적을 만든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창조의 가치는 날줄과 씨줄이 만나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 아닐까.

동아시아문화도시도 마찬가지다. 삶은, 풍경이라는 거짓말이라고 한 사람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문화적 간극을 좁히며 감동의 새날을 준비할 수 있다면 사사로운 풍경도 시가 될 것이며, 아름다운 노래가 될 것이고, 불멸의 향기와 춤사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래 윗집으로 마실가던 시대에서 이웃나라로 마실가는 세상이 되었으니 언어가 다르고 문화와 행정이 다르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서로 다른 양식과 감성이 모여지면 더 좋은 질서와 문화적 감성을 만들 수 있으니 오라 동아시아여, 불타는 시대여, 사랑이여.

급한 마음에 여행가방 챙기는 것도 잊었다. 북경, 상해, 심양, 무한 등 중국의 여러 도시를 다녀왔지만 칭다오는 이번이 첫 경험이다.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청주와 함께 중국의 칭다오, 일본의 니가타가 선정되면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칭다오를 공부했지만 독일과 일본의 지배를 받은 도시, 한국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도시, 맥주의 도시라는 기본 상식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간절했고, 서로가 하루 빨리 만나서 올 한 해 사업계획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칭다오 방문 기간은 1박2일이다. 짧아도 너무 짧지만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실무회의가 목적이었으니, 그러고도 시간이 주어진다면 칭다오의 아침 공기를 마시고 싶었고, 사람들의 풍경을 엿보고 싶었으며, 문화적 근원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야 진정한 문화도시의 교류가 시작될 것 같았다. 8시간이 넘는 마라톤 회의가 진행됐다. 칭다오와 니가타에서 차례로 올 한해의 사업계획을 설명했다. 3개 국어로 통역까지 해야 하니 지루하기도 했지만 결코 한 눈 팔 수 없는 일이었다. 칭다오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영화, 서예, 음악, 공예, 문화콘텐츠 등 각 분야별로 교류사업을 제안했으며 일본에서는 청소년, 농촌, 미디어 등의 교류를 제안했다. 청주에서는 공식행사, 특별행사, 연계행사, 중장기사업 등을 설명하면서 한중일 젓가락페스티벌과 자장가 프로그램 제시했다. '생명'을 테마로 한 동아시아 문화가치를 공유하고 나눔과 협력의 새 시대를 열자는 것이었다.

젓가락페스티벌은 이어령 명예위원장의 아이디어인데 참석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회의가 끝나면 만찬장에서 젓가락대회를 열수 있다며 흥분하는 등 긴장했던 회의장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마라톤 회의가 끝난 뒤 4시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젓가락미팅을 통해 동아시아의 우정과 감성을 나누었다.

이튿날, 칭다오의 바다를 걸으며 아침을 열었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라며 '겨울 바다'를 노래한 김남조 시인처럼 매운 해풍을 알몸으로 단련시키는 칭다오 사람들을 보며, 푸르고 진한 먹물을 토해내는 파도를 보며, 높고 맑게 피어나는 하늘을 보며,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붉은 집들의 풍광을 보며, 초고층 빌딩숲과 최첨단 공연시설물을 보며, 분주하지만 갈 길이 분명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끄덕이고 끄덕였다. 칭다오의 아침은 차갑지만 엄연하고 햇살까지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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