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 교정자문위원

 "충청도 것들은 삼국시대 이래로 변절을 밥먹듯이 한 싸가지 없는 배신자들이다." 본지 독자들께서는 대부분 충청도민인데 뜬금없이 칼럼에 왠 충청도 욕지거리냐라고 생각하면서 필자를 고소해서 혼내주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형사법은 이런 집합명칭에 대한 명예훼손적 또는 모욕적 표현을 벌하고 있지 아니하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혐오표현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셈이다.

 사실 필자도 오랜 객지생활 중에 완벽한 표준어 구사능력 덕분에 필자가 충청도 출신임을 모르는 사람과의 술자리에서 이같은 혐오표현을 들었다. 그럴 때 필자는 무지에서 비롯된 상대방의 도발을 애써 외면하거나, 스스로 충청도 출신임을 굳이 밝히지 않는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 짓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회피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 명제는 참이 되어가고, 다른 차별과 혐오의 근거로 쓰이기 일쑤였다. 물론 위에 언급했다시피 집합명칭에 의한 명예훼손이나 모욕은 형사적으로 처벌받지 않으므로 그런 발언을 한 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기껏해서 충청도 출신 동료의 신뢰를 잃는 수준이다.

 혐오표현이 단지 사람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수준에만 머문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충, 김치녀, 개독교인 등과 같은 혐오표현들이 일상어로 인식되기에 이르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인터넷 포털 기사의 댓글을 한번 보자. 도대체 이 나라가 어찌 한 나라로 존속하는지 신기할 정도로 일상화된 혐오발언들이 넘쳐나고 있고, 그것이 혐오표현인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사용하다가 된서리를 맞은 아이돌 그룹도 있다.

 어떤 사회학자는 사회전체가 분노에 찌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혐오발언이 넘쳐나고 것이어서 절망한 사회에 희망을 줘야 이런 사회적 화병이 치유된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다만 필자는 도덕적 잣대에 의한 교화와 치료를 하기에 앞서 그런 혐오표현을 병으로 진단하는 공적인 선언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막연한 치료에 앞서 소수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표현 형사처벌 입법을 통해 혐오표현을 표현의 자유영역에서 도려내는 수술이 필요하다.

 물론 이같은 입법은 헌법상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의 본질이 "내가 싫어하는 다른 의견을 법의 이름으로 억압하지 말자"는데 있지 "자신의 혐오를 자유롭게 표현해도 좋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건전한 공론장의 형성에 기여하기 때문에 널리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유의 이름으로 건전한 논의 자체를 차단하는 표현에 대한 면죄부를 인정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적 약자나 소수에 대한 혐오 표현을 형사처벌하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일례로 영국의 '공공질서법', 독일의 '홀로코스트 부정 금지법'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는 인종과 종교 등을 근거로 한 혐오표현을 형사적으로 엄히 처벌하고 있고, 얼마 전 UN 인권이사회에서는 우리나라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입법을 권고한 바도 있다.

 넘지 말아야할 선을 그어 주었을 때, 일반인들로 하여금 선 안에서의 폭넓은 자유를 누리게 만든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른바 울타리의 역설이 바로 그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그 어떤 기본권보다 소중히 여기는 유럽 등에서 소수에 대한 혐오발언에 대한 형사처벌 입법이 있은 이후, 형사처벌되지 않는 영역에서의 표현의 자유가 오히려 더 신장되었다고 한다. 울타리의 역설이 표현의 자유 한계설정에서도 유효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이미 증명된 것이다.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그 차별의 대상이 소수가 되었을 때이다. 그리고 어떤 이가 모든 영역에서 주류가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런 무분별한 소수에 대한 혐오가 언젠가는 나를 향하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혐오표현의 홍수는 소수에 대한 관용을 생각할 여력조차 없는 지금 우리사회의 민낯이다. 물론 그런 혐오적인 표현을 일상적으로 하는 이들은 삶에 지쳐 익명성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분노를 토해내듯 배설할 수 밖에 없는 큰 병에 걸린 불쌍한 환자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관용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이 진정한 관용의 사회를 만드는 길이라는 점에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이 사회에서 혐오표현이라는 환부를 도려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