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 실수인지도 몰라 /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안나 / 불안 해 할지도 몰라 / 하지만 꼭 오늘밤엔 해야 할 말이 있어 / 약한 모습 미안해도 / 술김에 하는 말이라 생각하지는 마" 가수 김동률이 부른 '취중진담(醉中眞談)'은 술의 힘을 빌려 사랑을 고백한다는 내용이다. 혀 꼬부라진 소리라도 사랑을 고백한다면 대다수 연인은 달콤하게 들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공직자 또는 대중적인 인기를 먹고사는 유명인이 가사의 한 대목처럼 술에 취해 아침이면 생각하기도 '끔찍한' 속내를 털어놓았다가 망신을 당하고 후회하는 일은 의외로 흔하다. 공직자라면 아예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기도 한다.

올 초 이정호 KEI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의 '친일선언'도 술자리에서 빚어졌다. 세종시 모 식당에서 열린 한국환경정책ㆍ평가연구원(KEI)이 주최한 워크숍에 참석한 이 센터장은 건배사에서 "나는 친일파(親日派)다",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다"라는 등의 발언을 웃으면서 늘어놨다고 한다. 그는 "천황(일왕)폐하 만세"라고 세 번 외쳤다. 뒤늦게 일파만파로 파장이 커지자 그는 '취중실수'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자라면 솔직히 털어놓고 사과하는 게 우선이지만 그는 변명부터 했다.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열흘 전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 기자들과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 도중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옷을 벗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모 신문 논설주간이 금권(金權)으로 정치를 좌지우지한 대기업 회장에게 했던 바로 그 대사다. 그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공무원 정책실명제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기자들과 논쟁을 벌이던 중 이 같은 상식이하의 말을 했다. 자리에 일어나기 전 자신의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술의 힘에 빌려 객기(客氣)를 부린 것일까. 이처럼 고위공직자들의 혀가 풀린 것을 보면 박근혜 정부의 말기가 다가온 듯하다. 시대착오적이고 봉건주의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고위직에 임명됐는지 궁금하다. 국민 정서와 너무 동떨어진 사고를 갖고 있다.

김낙기 서강대 초빙교수는 어느 글에서 사람이 술에 취하면 네 가지가 차례대로 풀린다는 사해(四解)를 조심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입이 풀려 말실수를 하게 되는 해구(解口)단계, 두번째는 추녀가 양귀비로 보이는 등 이성에 대한 자제력을 잃는 해색(解色)단계, 그 다음이 세상을 원망하며 물건을 깨거나 주먹질을 하는 해원(解怨)단계, 마지막으로 인사불성이 돼 의식을 잃고 죽음 직전까지 가는 해망(解妄)단계다. 이정호씨와 나향욱씨는 해구(解口) 단계에서 공직자로서 오랜세월 쌓아온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하지만 이들이 한 말이 단순히 말실수가 아니라 취중진담이라면 언제든 불거질 일이었다. 옛말에 무릇 군자는 세 끝을 조심(君子避三端)해야 한다고 했지만 특히 공직자는 설화(舌禍)를 경계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훅 간다.

/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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