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와 천안의 중간지점에서 길목을 차단하고 있는 전의(全義) 운주산성(雲住山城)은 신라의 서진과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내던 백제의 선봉장이자 후삼국 시대 백제부흥을 꿈꾸던 유서깊은 산성이다.
 연기군 전의면 노곡리와 전동면 미곡리, 청송리에 걸쳐있는 운주산성은 해발 459m의 운주산을 감싸고 있다. 운주산 계곡을 아우르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둘레가 3098m나 되는 비교적 큰 산성이다.
 구름이 머문다는 산성의 이름이 말해주듯 멧부리 정상에서 백제의 외로운 넋을 보듬어주기라도 하는양 새털구름이 내려앉고 산중턱을 끌어앉은 허리안개가 도너츠 모양으로 뽀얗게 피어오른다.
 신라와 고구려에서 차령산맥만 넘으면 백제의 땅으로 진입하게 된다. 웅진, 사비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며 7백년 백제사직을 지키던 차령산맥의 수문장이다. 운주산성은 보기 드물게 외성, 내성의 형태를 가진 복합성이다. 계곡을 감싼 외성 석축과 더불어 치소(治所)로 보이는 핵심부를 보호하는 둘레 543m의 내성이 있다.
 밖으로는 돌로 쌓고 안으로는 흙을 다진 내탁(內托) 공법의 외성과 달리 내성은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협축성(狹築城)이다. 하단부에 대형의 석재를 다듬어 1~2단을 쌓고 그 위에 성돌을 쌓는 방식으로 보아 백제계의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초기에는 신라 산성이었을 징후도 있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후 백제의 고토 200여개 성에서는 백제부흥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다.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을 모셔오고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이 중심이 되어 사직의 부활을 도모했는데 결사항전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주류성(周留城)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주류성의 위치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부안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이외에도 홍성, 예산 등 주류성으로 비정되는 곳이 수십군데에 이른다. 전의 운주산성은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곳 중의 하나다.
 이 성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운주산성에는 삼천굴과 피숫골이 있다한다. 나·당 연합군에 쫓진 백제 병사와 주민들이 운주산성 삼천굴로 숨어들었는데 한 아이의 울음소리로 들통이 나 피신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해 일대가 피의 내를 이뤄 「피숫골」이라 불렸다 한다. 삼천굴은 신라병사들이 굴 입구를 막아놓아 지금도 어디인지를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백제유민들의 한이 서린 운주산성에서 매년 10월이면 고산제(高山祭)가 열린다. 고산은 운주산의 옛 지명이다. 최병식 운주문화연구원장 등이 주축이 되어 올리는 고산제는 백제부활의 꿈을 접고 성벽에서 최후를 마친 백제병사와 백제유민에 대한 일종의 위령제이다.
 지난 1990년 운주산성 정상에는 「백제의 얼 상징탑」이 건립되었고 제단도 아담하게 마련되었다. 백제인의 설움이 성벽과 역사의 가지에서 응어리가 진듯 눈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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