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빗소리에 느껴지는 자유로움
심신을 달래주는 '차 한잔의 여유'

어둠을 뚫고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시원하게 들려오는 빗소리는 듣고만 있어도 묵은 체증이 가시는 것 같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회백색 하늘 아래 맑고 투명한 작대기들이 무수히 쏟아져 내려온다. 쏴~ 이 적막감, 이 여유로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나만의 자유로움. 시간이 그대로 멈춰진듯하다.

저 멀리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목말라 애태우던 잎사귀들의 환호성인가. 반질거리는 나무의 잎 끝으로 투명한 이슬이 맺힌다. 기쁨의 눈물 같다.

이른 새벽. 밤사이에 뿌려진 비로 말라비틀어진 작은 풀잎들이 고개를 들고 배시시 웃고 있다. 매일같이 오르는 우암산 산책로. 여린 잎사귀들을 볼 때마다 늘 안타까운 생각이 앞섰는데. 충족한 만큼의 비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뿌려진 비에 감사한 마음이다. 물의 소중함이 더없이 느껴지는 계절이다.

여름의 길목에서 턱없이 부족한 비로 사람도 자연도 목이 마른다. 그런데도 물은 물이요, 불은 불인가 보다. 말라 타들어가는 잎들의 아우성엔 아랑곳하지 않고 태양빛은 점점 붉게 타오른다. 그 광란의 정점에서. 숲 속의 나무와 꽃과 풀들은 깊고 진하게 익어간다. 제철 만난 태양의 노출은 붉고 검푸른 여름을 태워내야만 하는 숙명인가 보다.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여름은 불타는 계절인가.

태운다는 생각을 하면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일, 젊음, 열정, 몰두, 집념, 집중, 사랑, 고도로 이루어진 일의 성과물. 현대인의 삶 자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싶다. 욕망과 성공을 이루기 위한 삶.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이 기계처럼 전진하는 사람들. 제 몸 녹아나는 줄 모르고 태우기만을 좋아하는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 같다.

어느 유명한 철학교수의 이야기다. 커다란 상자 안에 그는 탁구공, 자갈, 모래 등을 차례대로 넣고 그곳에 홍차를 부었다. 홍차는 붓자마자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이 상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미 깊은 메시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탁구공, 자갈, 모래는 각각 크기가 다르다. 큰 탁구공을 먼저 넣고 작은 공간에 자갈과 모래를 채워야 다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성공과 목적만을 위해서 성급하게 달리기만 하는 현대인의 일상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에 부은 홍차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유'를 말하는 듯하다. 휴식을 통한 '여유' 있는 삶이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이다. 홍차는 붓자마자 순식간에 타고 연기만 올라왔다. 일과 능률만 중요시하며 점점 황폐해져 타들어가는 자신의 심장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욕망과 물질에만 귀 기울이는 탕자들의 삶을 말하는 것 같다.

정지연

바람보다 더 빠른 시간. 우리는 더 나은 미래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 숨 가쁘게 질주한다. 마치 심장 없는 로봇처럼. 하루의 에너지를 잠시의 휴식도 없이 일의 절정을 위해 태우기만 한다면, 가뭄에 말라비틀어지는 꽃, 나무와 다를 것이 뭐 있겠나.

누구나 차 한 잔 마실'여유'는 있다. 여유로운 시간은 지친 내 육신을 달래주고, 맑 고 향기로운 차는 삶에 찌들어있는 나의 영혼을 맑게 해줄 것이다. 굵게 쏟아지는 빗소리도 여유로운 시간에 동참해준다. 시간의 지금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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