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1월 하순 금강가의 매서운 겨울 바람이 우리 발굴대원들을 괴롭히고 있을 때 우리 대원들은 한 달이 넘는 겨울 발굴을 정말 힘들게 진행하며 지쳐 있었다. 이러한 때 따뜻하게 데운 물로 이 유물이 깨끗이 씻겨진 판판한 돌에 그 모습이 나타났을 때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바로 굼(위·아래가 맞 뚫리지 않은 파인 구멍)이었다. 갈아서 아주 판판하게 만든 면 위에 손질한 굼이 관찰되었으나, 과연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어렵사리 발굴을 진행하여 이 발굴을 끝으로 보은군 회남면 사탄리에 있는 말 무덤을 조사하던 중에 다시 이 아득이 고인돌 유적으로 오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발굴이 덜 된 부분을 다시 발굴하여 간돌검을 찾아 학계에 보고하게 되었다. 역시 땅속 비밀은 오만을 갖고 발굴하면 이런 큰 실수를 하게 된다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되어 지금까지도 강의할 때마다 그 얘기를 들려 주고 있다.
 2월 발굴을 끝내고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동안 필자는 판판한 돌판을 실측하게 한 뒤 관계 있는 굼끼리 연결시켜 보고자 서너달에 걸쳐 방을 찾아온 여러 학생에게 실측도를 주고 마음대로 연결을 짓게 하는 시도를 해보았으나 뾰족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확대경을 갖고 여기에 있는 굼을 조사한 결과 그 굼은 크고 작은 두 종류의 굼이 모두 65개나 되며, 쪼으기와 갈기의 두 방법이 쓰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이 굼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몇 달간을 고민스럽게 보냈다.
 우선 한국과학사를 뒤져보기로 하였다. 전상운 교수가 쓴 ‘한국과학사’에 고구려고분에 나타난 별자리 1,200개는 우리 눈에 보이는(可視) 실제 별자리인 것으로 해석하는 글은, 다시 말하면 지금부터 1,500년 전에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별 수를 다 그려서 벽화에 남겼다니 이런 놀라운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미쳤다.
 그러다가 불란서에 후기 구석기시대의 뼈에 나타난 굼을 조사한 A. 마샥 교수의 관찰로는 이 굼들이 2⅓ 개월의 달(月) 변화를 표시하였다는 연구결과와 영국의 스톤헨지가 4계절의 해돋이와 해지기의 관찰을 위한 축조물로 보는 A. 텀 교수의 해석은 천체 관측 자료로 볼 수 있는 근거를 갖게 하였다.
 더욱이나 앞서 설명한 안터 1호 선돌에 나타난 둥근 원의 제작은 이미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원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연결하여서 이 돌판에 새겨진 굼은 별자리일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서에 서술하였다.
 이 보고서가 나간 뒤 여기에 주목한 김일권 박사(현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가 연이어 이 돌판을 소개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교육부의 예산지원으로 충북대학 박물관에서‘선사유적 발굴도록’(1998)으로 출판하여 색사진으로 이 유물이 보고되어서 박창범교수(당시 서울대)와 이용복교수(서울교육대학)의 연구가 따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서 공동연구를 하자는 필자의 제안에 따라 이 연구결과를 ‘한국 과학사학회지’(2001)에 발표하였다.
 이로 보건대 이 별자리 돌판은 고인돌과 같은 시대인 기원전 5세기에 북반구의 가을의 하늘이었음을 설명하여 주며, 당시 사람들은 “청동기시대에 별자리에 대한 상당한 관찰과 지식이 이미 있었음이 밝혀진 것”으로 해석하고 북한에 있는 고인돌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렇게 우리(박창범·이용복·필자)는 북두칠성·용자리·케페우스·작은곰자리·카시오페아 와 같은 별자리를 확인하여 당시 사람들의 별자리에 관한 인식 수준을 학계에 소개하였다.
 이처럼 발굴된지 20년만에 새로운 해석으로 옷을 갈아 입고 우리나라 뿐이 아니라 세계학계에 소개되는 영광을 갖게 된 이 별자리 돌판은 이 조사를 진행한 필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고고학도들에게도 구제발굴을 하고 보고서를 만들 때에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상기시켜 주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으로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아! 우리가 별자리 돌판을 못 찾았다고 한다면…, 또 내가 못 찾은 수많은 문화유산들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하다. / 충북대 교수·중원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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