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발굴 뒷얘기-구낭굴 조사(4)

1차 조사에 있었던 경험은 우리에게는 큰 교훈이 되었다. 82년 12월부터 83년 1월까지 두루봉 동굴 10차 조사(흥수굴 발굴)를 끝으로 한데유적인 수양개 유적만 조사하였기에 새로운 형태의 구석기 유적(동굴유적)을 조사하는 계기를 만든 셈이었다.
구낭굴 1차 조사를 끝낸 뒤 바로 충북대학교 박물관은 새로운 전시실을 마련하여 제 10회 아시아 올림픽 행사에 따른 전시문제에 매달리게 된다(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어서 중부 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사전 지표 조사와 발굴 문제로 86년과 87년을 보내게 되었다(이 얘기도 다시 소개할 예정이다).
88년이 되면서 구낭굴 2차 발굴 계획을 기필코 실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에 소개한 것처럼 구낭굴의 범위가 워낙 큰데다가 1차 발굴에서는 겨우 입구를 만드는 일과 중심광장을 일부분 발굴하여 겨우 앉아서 발굴할 면적과 위치를 만들었다는 생각은 필자의 뇌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전 박물관장이셨던 조성진 총장께서는 두루봉 동굴에 대한 애착을 갖고 계셔서 구낭굴 발굴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더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당시 경리과 이민재 과장은 필자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후원자임을 자처하면서 2차 발굴에 대한 예산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당시 행정사무를 맡았던 고 정광민 선생은 필자의 생각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해주고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하여주었기에 가능하게 되었다(다시 한번 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마침 88년도에 고고미술사학과가 만들어지고 1학년 학생들 30명이 입학하였기에 이들과 함께 여름방학에 발굴하도록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때에도 역시 우리 숙소는 비닐하우스가 고작이었고 필자가 묵는 집이라고 하는 것도 얇은 합판으로 벽과 지붕을 만들고 그 위로 비닐을 덮어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나은 것은 전기를 형광등으로 쓰게 되어 누전되거나 과전되는 일이 적어서 계획대로 발굴을 진행할 수 있었으며 캠프(캠프라야 비닐하우스이지만)에서부터 현장까지 올라 다니는 길이 전보다 훨씬 좋아서 시간이 단축되는 일이었다.
거의 30명 가까운 1학년 학생들의 발굴은 두루봉 발굴할 때인 76년에 비하면 훨씬 더 고고학적인 발굴방법을 진행할 수 있었던 점은 지금 생각하여 보아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때의 발굴도 국립대학에서 만들어준 특별 예산이라고는 하여도 너무나 적은 액수이었기에 우리 발굴 대원들은 먹는 것과 자는 것이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더욱이나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어찌 그때는 비가 자주 왔는지 비 오는 소리로 잠을 잘 수가 없는 날이 여러 날 이어서 거의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나면 그 다음날 발굴에 많은 지장을 가져 오는 날이 많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먹는 것이 형편없고 잠자리가 제대로 되지 못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 당시 발굴에 참여하였던 고고미술사학과 1회 졸업생들한테는 그저 미안한 생각과 함께 또 학교와 학문을 위해서 노력해준 그들의 성실함을 지금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밝혀 놓아야 할 터이다.
그 때 열심히 발굴하여 생각되는 학생으로는 강명호(관요 도자 박물관 학예사)·이은경(충북대학교 강사)·조재경(중앙문화재연구원 연구원) 등이 힘든 발굴을 잘 하여주었다. 그런데 특히 생각나는 제자는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남상식군은 ROTC 장교(중위)로 제대한 후 발굴에 참여하여 후배들을 다독거려 주고 용기를 주며 발굴 방법을 성실하게 설명하여 주는 선배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그래서 고맙다는 뜻으로 그 때 찍었던 사진을 발굴도록에 실렸고 구낭굴 발굴 슬라이드에 꼭 끼워넣어서 지금도 교양과목으로서의 ‘우리의 선사문화’와 전공과목인 ‘구석기 문화’ 시간에 소개하여 당시의 생각에 젖곤한다. 남중위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충북대·한국 고대학회 회장 이융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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