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발굴 뒷얘기-구낭굴 조사(5)

이렇게 실시된 2차 조사는 여름 장마와의 싸움이었다고 하겠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는 우리의 밤 수면을 짓밟아 버렸고 그러고 난 뒤에 그 다음날에는 발굴 현장으로 올라가는 길은 온통 산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우리를 괴롭히던 것은 굴 안에서 폭포같이 쏟아져 내리는 물들이 유물 위를 덮치는 일이었는데 도저히 이 물은 우리들의 발굴 방법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우리를 무척 곤혹스럽게 만들곤 하였다.
그래서 발굴대원들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모든 유물들을 계측하여 시급히 걷거나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비닐 주머니에 넣어서 쇠못으로 찔러 움직이지 않게 하는 그런 방법으로 유물 출토 위치를 지키느라 많은 고생을 하여야만 하였다. 고고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출토 유물의 원지점을 상세히 기록하여야만 하는 것이어서 필자는 이 사실을 지키도록 학생들에게 매우 강조하여 왔다.
또 우리를 힘들게 한 것은 비가 온 뒤에 우리가 파들어 간 바닥 면에 물이 고여 있어서 이 물을 퍼내어 다시 발굴 바닥 면을 발굴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는 하루가 걸리어야만 하는 그 과정을 일주일에 두 세차례 씩 반복하여야만 해서 작업이 무척 더디게 진행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발굴에서 얻은 성과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사람뼈를 찾았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우리 과의 교수가 된 박선주 선생의 연구로 밝혀졌는데 이 뼈들은 30대 남자의 뼈로 오른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복사뼈로 같은 사람뼈라는 사실이 밝혀져 우리를 더욱 더 흥분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81년도에 단양 상시바위그늘에서 손보기교수가 머리뼈를 찾아 ‘상시사람’으로 명명한 뒤로 이러한 사람뼈들이 동굴 유적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기대에 걸맞게 사람뼈를 찾게 되었음은 앞으로 이 동굴 유적에서 좀 더 많은 사람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가능성을 갖게 되어서 우리 대원들은 매일 힘든 발굴 과정을 잘 참고 견뎌주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여름 방학을 다 보낸 우리 대원들은 “드디어 우리들이 한 건 하였구나”라고 얘기를 할 만큼 기쁜 마음으로 귀교하였고 청주에 돌아온 그 날은 학생들과 폭음하였던 기억이 난다.
구낭굴 2차 조사를 끝으로 필자는 6년 간(83.3~89.2)의 박물관장 임기를 마치고 바로 ‘89 세계 정상 학자회의’(미국 메인 주립대학교, 89. 5. 27~6. 7)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수양개 유물을 발표하고 난 뒤로 계속하여 중국과 소련에서 개최되는 국제 회의에 참가하는 등 부지런히 수양개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소개할 예정이다).
이때 후임으로 박물관장이 된 고 임상묵 교수(미술교욱과)는 필자가 박물관장으로 있을 때 학예부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두루봉과 구낭굴의 발굴 과정을 익히 옆에서 보아 왔고 필자의 학문적인 연구 스타일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임관장은 필자를 위해서 두 개의 큰 선물을 만들어 주었다.
하나는 인문대학 3층으로 정리실을 만들어서 독자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여 주었고, 또 하나는 구낭굴발굴 보고서를 출판하도록 학교로부터 연구비를 받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어서 ‘단양 구낭굴 발굴 보고(Ⅰ)’(1991년, 4×6배판, 184쪽)를 학계에 보고할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는 점이다.
임관장은 바로 이웃에서 살고 있어서 거의 매일같이 필자의 집에 들르기도 하였고 또한 필자도 자주 임관장댁으로 놀러가기도 하여 가족끼리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렵사리 만들어준 이 정리실은 정말 많은 작업을 펼쳐 5년간의 연구를 진행한 끝에 충북대학교 인문·사회과학분야 학술 대상(1995년)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임상묵 교수에게 감사를 드린다.
/ 충북대·한국고대학회 회장 이융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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