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말기에 일제는 그야말로 정해진 수순인 우리 한국의 강제병탄에 있어서 그 시행 시점을 놓고 고민했더란다. 이제는 병탄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은 일본군이 길가던 군인을 아무런 이유없이 뒤에서 걷어차서 쳐다만 볼 뿐 대꾸도 하지 못할 때였다.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나당전쟁에서 패한 뒤에 자기 나라 왕에게 보고한 말이 “그 나라가 비록 적지만 임금이 백성을 자식처럼 위하고 백성은 임금을 어버이 모시듯 하여 쉽게 도모할 수 없었다”는 말과는 천양지차가 된 것이다. 물론 그 때의 군인들이 일제의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벌어진 서울 시가전에서 백중세를 벌이다가 탄약이 떨어져 불가불 향리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일제측에서는 매우 당황해 하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저력은 있었지만 말이다.

식민 지배 동안 일제는 우리 한국인의 외형에서부터 지역별 성향 및 역사까지 참으로 상세하게 연구를 하였다. 정부 차원의 연구를 이처럼 차곡차곡 진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완벽한 조선인 지배를 위해서였다.

일본이 독도관련 망언을 하거나 교과서 왜곡으로 우리의 사그러들려 하는 반일감정을 고취시킬 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그야말로 열화같은 시위와 일본 대사관에 계란 던지기, 일장기 불태우기 등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이외에도 혈서와 단지로 적개감을 일깨우기도 했었고, 이번에는 강물에 투신하기 까지 하였다.

일본의 망언은 우리 국민의 대일 역사의식을 가늠해볼 좋은 촉매제도 되지만, 정작 일본측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대하는지도 확인해 보았으면 한다. 나까소네 전 일본 수상이 한국사람의 반일감정은 “내가 한복 한번 입고 막걸리 마시면서 아리랑을 부르면 눈녹듯 사라질 것”이라고 했던 말은 한국인의 기질을 ‘양은 그릇’에 견주는 말과 상통하는 의미가 있다. 은인자중하고 예의 범절에 신중하여 진퇴가 분명하였던 우리 선조들처럼 일본을 포함한 주변국과의 역사적 사실은 결코 잊지 말고 냉정하고도 신중하며 철저하게 대응해 나가야 할일이다.

같은 전범 국가이면서도 과거사에 대한 사죄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 온 독일과는 달리 오히려 전쟁 피해국처럼 호들갑을 떨며 여론 몰이해 가고 있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저의는 무엇인가? 독도를 통해 일본 어민의 조업권을 확보함과 동시에 중국 및 러시아와 더불어 센카쿠 열도와 북방도 등을 놓고 벌이는 영토 분쟁에서 유리한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일면 외에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경제 도약이라는 당면 과제 실현에 몰두해 있을 때,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어마어마한 국가적 프로젝트로 북한 멸망 후 있을 괴뢰정부 수립 및 영토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있는 간도문제를 미연에 봉쇄하고자 힘을 쏟고 있다. 이렇듯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는 이면의 계산을 우리도 냉철히 연구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을 계기로 학계에서는 과거 일본의 망언 행태와 이에 따른 반대급부적 이익으로 무엇을 얻었는지도 밝혀 주어야 하고, 일본이 바라는 대로 일순간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상정하는 지경까지 가지 않고도 가진 자로서 의연하게 대처하여 일본이 다시는 그와 같은 엉터리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 위하여 독도 문제를 국책 연구과제로 제시하여 관련 학자들에게 연구비를 대폭지원해서 유익한 결과가 나오도록 지원해 주고, 국민 대상의 심포지움을 연례적으로 개최하여 전 국민을 독도 및 우리 역사의 전문가로 만들어야 하며, 우리 교육자들에게도 독도 방문을 통한 연수 기회를 제공해서 관련 지식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학생들의 독도 방문시 금강산의 경우처럼 여행비의 일부도 보조해 주었으면 좋겠다.

차제에 우리의 성숙하고도 차분한 국민 자세와 현명한 정부의 대처로 21세기 새로운 군국주의로 부활 가능성이 있는 일본과 선린관계를 맺으면서도 감히 우리나라를 넘보지 못하도록 지킬 것은 지키고, 이을 것은 이으며, 얻어 낼 것은 얻어 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충북도교육청 중등교육과 장학사 김 병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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