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은 만20세가 되는 이들의 앞날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성년의 날. 도내 대학 캠퍼스에서는 이날을 축하한다며 동료ㆍ후배들을 연못에 빠뜨리는 연례행사가 어제도 빠지지 않았다.
 문헌에 나타나기로는 처음 성년례를 치렀던 것이 고려 광종 16년이라고 한다. 세자 유에게 어른 옷인 덧저고리였던 원복을 입힘으로써 성인이 되었음을 만천하에 고했다는 것. 이후 양반가에서는 남자의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었고, 여자는 머리에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절차를 가졌다. 그리고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치르는 관혼상제 중 첫번째 관문인 성년례를 가장 중히 여겨왔다.
 우리의 습속도 그렇지만 문화와 전통이 다른 세계 각지에서도 성년이 되는 절차는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는 번지점프 또한 뉴질랜드 원주민의 성년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아프리카 마사이족은 할례식을 끝내고 거쳐야하는 1년간의 황야생활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무게가 80~1백kg이나 되는 들돌을 들어보이며 힘자랑을 하게 하고, 수십길 낭떠라지 위 바위 뛰어넘기를 하기도 했다는 우리네 기록도 있다.
 마사이족처럼 심지어 목숨을 잃게도 되는 성년식의 혹독함은, 곧 그들이 살아내야 하는 세상의 본질을 깨우쳐주려는 의도를 갖는 것이었다. 부모나 친족의 간섭과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지만, 그보다 더 무겁고 험난한 사회적 자아로서의 책무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성년이 되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고교졸업 후 1,2년쯤 지난 직장인·대학생이 해당된다. 이들은 몇몇 특별한 예외를 제외한다면 원없이 신체적·사회적 자유를 누렸을 것이다.
 그러니 점점 중요성이 사라지는 성년의 날에 백화점이나 제과점·꽃집의 이벤트가 판치는 것도, 전통이라며 사람을 물에 빠뜨리는 것도 이해가 될법도 하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장미꽃 몇 송이와 애인의 키스를 통해 담보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질임을 알아야 한다.
 성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혈혈단신으로 비바람 몰아치는 벌판에 내동댕이친 것과 같다. 눈비를 막아주던 가리개도, 아침 저녁으로 부모가 먹여주던 따뜻한 양식도 없다. 보다 더 중요한 건,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왜 가야하는가, 어떻게 가야하는가 등을 혼자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정은 잘못될 수도 있고,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러니 성인이 되기까지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외로움, 슬픔을 모두 더하더라도 턱없이 모자랄 심적·육체적·사회적 고통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이제까지 감당해왔던 거친 파도보다 훨씬 더 큰 파도를 대비하는 마음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할례식 후 황야로 갔던 아프리카 마사이족 중 살아남은 자들은 1년뒤 마을로 돌아와 전사 「모란」이 됐다고 한다. 할 일 많고 문제도 많은 지금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건 바로 전사 「모란」일 것이다. 그러니 이날은 장미 향내와 연인의 감미로운 입술에 취해 넘길 호락호락한 날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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