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이전까지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쌀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대략 3천년전 안팎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연이은 고고학적 발굴로 그 기록은 점차 올라가고 있다. 김포에서 나온 볍씨는 종래의 학설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놓았으며 일산 가와지에서 충북대 이융조교수팀이 발굴한 볍씨는 탄소연대 측정결과 5천20년이라는 절대연대 값을 얻어냈다.
 이같은 사실은 한반도의 농경문화 출발점을 청동기에서 신석기 시대까지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오창산업단지에서 지난 94년 이융조 교수는 무려 1만3천년~1만5천년 전의 볍씨를 찾아냈다.
 지하 4~5m의 토탄층에서 나온 이 볍씨는 고대벼와 유사벼로 분류된다. 이 볍씨가 재배된 것인지, 야생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탄소연대측정을 거쳤으므로 지구촌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연대상으로 보아 소로리 볍씨가 나오기전까지는 중국의 볍씨가 가장 오래된 볍씨로 간주되었었다. 중국 회하(淮河)언저리에 있는 가호(賈湖)유적 볍씨 1만년전, 양자강 유역 옥섬암 동굴유적과 선인동 유적 출토 볍씨 1만년~1만2천년전으로 이 분야의 참피언 역할을 하였는데 이제는 소로리 볍씨가 그보다 1천년~3천년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농경문화의 원조로 부상하게 되었다.
 지난 10월, 청주MBC 등의 협조를 얻어 재발굴한 결과 여러가지 의문점이 상당히 풀리게 됐고 소로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농경문화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삼국시대, 신라 고구려 백제가 금강 상류지역인 미호천 유역에서 혈투를 벌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진천 등 철의 생산지를 선점하기 위함이었고 또다른 이유는 내륙의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까치내(鵲川) 부근에 쌓은 정북동 토성을 보면 농경문화와 곡식생산에 관한 싸움의 한 단면을 가늠하게 된다. 3~5세기에 축조된 이 토성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토성중 가장 형태가 확실한 교과서적인 토성이다.
 미호천변, 평지에다 왜 이같은 성을 쌓았을까. 그 이유의 하나는 바로 곡창지대를 확보하는데 있었다. 진천에서 오창, 청주, 보은으로 이어지는 구릉지대는 교통의 요로일 뿐만 아니라 곡창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삼국이 눈독을 들일만한 곳이었다.
 「청원 생명쌀」이 제 4회 전국쌀 품평회 대축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옥산 소로리에서 부터 무려 1만5천년간이나 우수 쌀 유전인자를 물려받고 가꾸어 온 덕택이다. 그 오랜 농경문화의 호흡이 오늘날 청원 생명쌀을 탄생케 한 것이다.
 WTO체제의 출범과 더불어 쌀 값이 떨어지는 시점에서 쌀 농사의 관건은 양(量)보다 질(質)에 달려 있다. 청원 생명쌀을 더욱 가꾸고 상품화하여 WTO의 격랑을 헤쳐나갔으면 한다. 이참에 소로리 유적을 보존한다면 금상첨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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