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직지는 간기가 있는 하권이다. 1377년 청주목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는 애당초 상권, 하권이 있었는데 상권은 전하지 않고 오직 하권 1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그렇다면 금속활자로 만든 직지 상권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주 없어졌을 수도 있고 지구촌 어디에 은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직지는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간행되었는데 1년뒤인 여주 취암사(鷲岩寺)에서 목판본으로 다시 찍었다. 목판본으로 다시 찍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인쇄물량의 부족이었거나 흥덕사의 돌연치 않은 사고(화재및 경제력 등)에 기인한 듯 하다.
 취암사 목판본은 상·하권이 모두 전한다. 목판본 직지 상권은 37장으로 흥덕사 금속활자본 직지 하권 39장과 엇비슷하다. 목판본 크기는 금속활자본의 3분의 2정도로 다소 작다. 금속활자본은 1행에 18~20자가 새겨져 있는데 목판본은 1행에 20여자로 자수가 약간 많고 글씨가 작다. 그러나 목판본은 인쇄상태가 금속활자본 보다 훨씬 정갈하다.
 이는 초기 금속활자본의 제작 기술상태가 덜 발달했기 때문이다. 초기 금속활자본은 활자가 붙어 있다든지 일부 활자가 뒤집혀 조판된 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바로 이런점들은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직지 상권에는 목은 이색과 성사달(成士達)의 서문이 있다. 이색의 서문은 1378년 4월 5일에 쓴 것이고 문인 성사달의 서문은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본을 인쇄하기 4개월전인 1377년 3월에 쓴 것이다. 이로보면 흥덕사본과 취암사본의 직지 상권 서문이 같은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간기만 빼놓으면 직지 하권의 내용이 서로 같은데 상권의 내용이 다를리 없다. 이색의 서문은 법린(法麟)이, 성사달의 서문은 달담, 석찬이 간청하여 작성된 것이다. 달담, 석찬은 누구인가. 직지 하권 간기에밝혔듯 그들은 백운화상의 문도로 직지간행의 실무 책임자들이다. 이로보면 직지 상권의 서문은 흥덕사본이나 취암사본이나 같을 가능성이 더욱 짙고, 따라서 직지 찾기의 방향도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간기가 있는 직지 하권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서문이 있는 직지 상권과 더불어 금속활자본으로 만들었을 다른 서적을 아우르면서 고서적 찾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자비도량참법집해등은 서지학계에서 흥덕사에서 인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쉽게 얘기하면 「직지 찾기」보다는 「흥덕사본 찾기」운동에 나서야 보다 포괄적인 문화운동이 된다고 본다.
 금속활자장 오국진씨가 취암사 목판본을 토대로 금속활자본 직지 상권을 복각한 것은 조상의 슬기 재현이라는 점외에도 직지찾기의 방향을 제시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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