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교(踏橋)놀이란 말 그대로 다리(橋)를 밟는 놀이다. 순수한 우리 말로는 「다리밟기」라 부른다. 이 놀이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행해지던 민속놀이다.
 다리밟기는 특정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중에서 「강릉 하평 답교놀이」「안양 만안 답교놀이」 「수원 답교놀이」 그리고 청주 지역의 「남석교 답교놀이」등이 유명했다.
 답교놀이의 풍습은 대체로 비슷하다. 자기 나이대로 다리위를 오간다. 스무살이면 20번, 쉰 살이면 50번을 오가며 건각(健脚)을 기원한다. 여기에다 영복송액(迎福送厄)이라는 주술적 의미도 보태졌다.
 그러나 다리밟기는 단순히 악귀를 쫓고 복을 빈다는 주술적 의미만 띤 것이 아니다. 다리밟기를 통해서 실제로 다리의 힘을 길렀으니 오늘날로 치면 성인병 예방의 의미도 지닌 것이다.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다리를 오가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늙으면 늙을수록 운동을 더 해야 한다는 건강비법을 민속놀이를 통해 넌즛이 알려준 것이다.
 때에 따라서 다리밟기 놀이에는 풍물이 등장하여 흥을 돋우었다. 풍물가락은 다리밟기 행사의 백 뮤직이 되었던 것이다. 어떤때는 광대가 등장하여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
 다리밟기는 대체로 고려때 시작돼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우리의 일반적 관념보다 남녀의 교제가 훨씬 자유로웠다. 따라서 다리밟기는 남녀의 은밀한 데이트 코스를 제공한 부수적 효과도 뒤따랐던 것이다.
 반상과 남녀의 구별이 엄해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런 폐단(?)을 피하고저 지역에 따라서 답교놀이 행사를 별도로 벌이기도 했다. 즉 양반들은 14일에, 서민들은 15일에 답교놀이를 했다고 한다.
 유청자씨가 발굴한 수원 답교놀이는 1995년 오경환씨에 의해 재연되었다. 일제때 도대방을 맡은 이화실과 김향화는 답교놀이에서 일본인 하오리를 쓰고 연극과 재담을 펼치며 일본인을 조롱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유청자, 수원답교놀이)
 전국의 답교놀이는 1920년~1930년까지 지속돼오던 풍습이었으나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이 땅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청주의 남석교 답교놀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답교놀이 이전에 남석교 자체를 도시개발이라는 미명아래 땅속에 묻었으니 답교놀이도 자연, 없어지게 된 것이다.
 80세가 지난 청주 노인들은 남석교 답교놀이를 기억한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풍물을 울리며 남석교를 오가던 추억의 조각이 아스라히 되살아 나는 것이다.
 70여년만에 남석교 답교놀이가 육거리 재래시장 일대에서 재현됐다. 비록 길이 5m, 너비 1.5m, 높이 1m의 모형 돌다리에서 재현된 답교놀이였지만 우리 무형문화의 원형질로 접근해 봤다는데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앞으로는 모형이 아니라 실제로 남석교를 발굴하여 옛 모습 그대로 답교놀이를 실시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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