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쳐디자이너·에세이스트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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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문화칼럼 변광섭] 날이 밝아지기 무섭게 새들은 제가끔의 목소리로 울어댄다. 마당의 꽃과 풀들은 저마다 깨어나서 바쁜 숨을 내신다. 햇살이 수련 곁으로 다가가 아침잠을 깨우더니 수련 밑 물속까지 기웃거린다. 작은 연못의 음영이 낮고 느리게 비추고 흔들린다.

뒷산의 소쩍새는 기어코 숲의 비밀을 재잘거리더니 온 동네가 소란스럽다. 그 사이 햇살은 눈이 부시다 못해 한 여름을 불태운다. 정중동(靜中動). 고요 속에서도 자연은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다. 자연은 제 색깔을 모를 것이고, 제 운명 또한 알 리 없다. 오직 살아야하고 견뎌야 하며 뒤돌아보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삶만 심드렁하고 갈피 없으며 헐렁하다. 본질을 찾아 나서야겠다. 자유의 본질, 사랑의 본질, 생명의 본질을 향해서 말이다.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벌랏마을 이종국 작가가 닭을 삶았으니 잠시 무더위를 피해 가라는 것이다. 사진작가, 그림작가, 문학인 등 여러 명이 함께하고 있다는 귀띔도 있었다. 들뜬 마음에 도시를 빠져나와 대청호반을 돌고 돌아 벌랏마을에 도착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숲과 물과 마을의 풍경 모두 한유롭고 오달지다. 도시만 탈출해도 이렇게 삶의 여백이 생긴다.

마을의 큰 공터에 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닥나무 껍질을 벗기느라 진한 땀방울 가득했다. 닭을 삶는다고 해서 달려왔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닥나무 껍질을 벗기를 이유가 궁금했다. 이종국 작가는 "닥나무를 삶아야만 껍질을 벗길 수 있어요. 나는 닥(나무) 삶는다고 했지 닭을 삶는다고 하지 않았으니 어서 닥 껍질 벗기는 일부터 도와주세요"라며 바쁜 손놀림을 재촉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서울과 청주 등지에서 온 작가들이다. 문의 벌랏마을을 창작거점으로 삼고 자연을 벗 삼아 새로운 예술혼을 불태우겠다는 사람들이다. 닥나무 농사를 짓고 수확하며 한지를 뜨고 자연 속에서 예술의 영감을 얻고자 모인 것이다. 때 마침 20여 년 자란 닥나무 수백그루를 수확해야 하는데 이들 모두 일손이 된 것이다.

닥나무는 천 년의 한지를 만드는 원료다. 예전에는 닥나무 재배를 하고 한지 뜨는 마을이 많았는데 절멸위기에 처해 있다. 대한민국을 통틀어도 10여 개 마을이 남았을까. 하는 일이 고되고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값싼 수입 종이가 밀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닥나무를 재배하고 한지를 만드는 사람은 돈벌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고유의 삶과 멋, 역사의 맥(脈)이 단절되면 안된다는 절박감과 해야 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고 했다. 한지는 500년 가는 비단보다도 더 귀하고 오래 가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의 의궤가 세계유산이 된 것도 한지 때문이다. 닥나무를 재배하고 수확하며 뜨거운 물에 삶고 껍질을 벗긴다. 닥풀과 잿물을 함께 넣어 물에 풀어야 하고 한 장 한 장 뜨고 말리고를 반복해야 한다. 99번 장인의 손을 거쳐 마지막 100번째 쓰는 이의 손길이 있어야 한지가 완성된다고 해서 백지(百紙)라고도 부른다.

한지를 사용하면 미세한 자연의 향기와 숨소리가 끼쳐온다.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며 우리 고유의 삶과 멋에 매료된다. 우리의 문화는 젖고 물들며 스미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벌랏마을에서 최고의 예술적 경이로움을 맛보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귀띔했다. 최고의 예술은 자연이라고, 우리가 하는 모든 예술행위는 자연을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리하여 이곳의 모든 것이 예술이라고….

변광섭 에세이스트
변광섭 에세이스트

아름다움은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의 몸에 배어들기 시작하는 '아우라'를 말한다. 아우라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몸짓이다. 히브리어 토브(tob)는 '착하고 향기로움'을 뜻한다.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내며 지켜내는 행위다. 자연이 그렇듯이 우리의 본질, 인간의 아름다움을 찾아 길을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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