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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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문화칼럼 변광섭] 그날 승용차 뒷좌석에 쌀 20㎏ 한 자루가 나그네의 길벗이 되었다. 호기심 가득했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누구네 밥상위에 올라갈지, 사람들이 맛나게 먹기는 할 것인지…. 쌀 한 자루는 별별 생각 다 했을 것이다. 앙가슴 뛰는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예산에서 청주로 향하는 내내 하얀 쌀들의 군단과 말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쌀 한 자루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의 황새마을에서 수확한 것이다. 천연기념물 황새가 사는 곳은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당연히 농사를 짓는데도 농약 하나 맘대로 뿌릴 수 없다. 대지의 기운과 숲의 비밀과 새들의 이야기를 간직해야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믿을 게 하나 없다며 구시렁거리지만 이 동네의 쌀맛은 전국적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햇살과 바람과 물, 그리고 농부의 진한 땀방울로 빚은 것이다. 지나간 추억도 희망이라고 했던가. 40년 전의 스승이신 이재인 선생님이 운영하는 충남문학관을 잠시 들렀을 때 당신께서 바리바리 싸 주신 것이다. 농약 한 번 주지 않은 것이니 가족들과 맛나게 먹으라면서, 텃밭을 일구며 작은 것이라도 나눠먹는 소소한 풍경에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아, 어디 쌀 한 자루 뿐이었던가. 신문지에 쌓여 있는 소고기 한 근도 뒷좌석에 조신하게 앉아 있다. 오늘 저녁 식탁의 주인공들이다. 광시면 소재지는 그야말로 소고기집이 도열해 있다. 이 중에 단골집으로 발길을 옮기더니 직접 고기를 고르셨다. 쌀 한 자루에 소고기 한 근. 이 얼마나 행복하고 달콤한 순간인가. 오늘 저녁, 우리 가족은 황홀한 성찬을 즐길 것이다. 얼핏 스쳐가는 당신과의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삶의 향기가 진하게 번질 것이다.

선생님은 도자기 필통 하나를 덤으로 얹어 주셨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족 계관시인 김철 작가가 사용했던 것이다. 김철은 참혹하고 무자비한 전쟁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남의 땅에서 기어코 살겠다며 견뎌온 나날들이 얼마다 가슴 시리고 아팠을까. 그 삶의 마디와 마디를 시로 쓰면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살아왔다. 이 필통은 작가의 쓸쓸한 밤, 괴로움에 치를 떨며 글을 쓰던 그 날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지경돌>, <내 고향 금물결>, <변강의 마을>, <동풍만리>, <황혼의 로맨스>, <휴전선은 말이 없다> 등 40여 권의 시집을 냈다. "논벌은 만삭이 되어도, 넌 늘 배고파 운다. 그늘진 삶의 광야에, 숙명의 느낌표 하나 세워놓고, 뻗치며 살아가는, 고달픈 인생의 홀로서기!" 이렇게 생사의 언덕을 넘어, 꿈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피를 토하면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작은 필통은 작가의 전부다. 몇 해 전에는 서정주 시인의 펜촉을 하나 주셨다. 1960년대에 시인께서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잉크를 꾹꾹 눌러가며, 침까지 발라가며 밤 새워 시심을 가꾸었을 시인의 음영이 얼핏 스쳐온다. 시를 쓰고 싶을 때, 사랑하고 싶을 때, 살고 싶을 때 녹슨 펜촉을 보며 느슨해진 마음을 다스리겠노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변광섭 에세이스트
변광섭 에세이스트

이재인 선생님은 중학교 때 국어과목을 담당하셨다. 내 글을 보면서 "너 글밭 참 좋다. 작가해도 되겠는데"라는 말 한 마디가 나를 앙가슴 뛰게 했다. 그날 이후 틈만 나면 글을 써서 교무실로 찾아갔고, 초정약수 한 박스 이고 선생님 댁으로 달려갔다. 당신께서는 교육부로,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으며 고향인 충남 예산에 문학관을 만들었다. 전국의 문인들이 사용했던 인장과 장서표를 2천여 개 소장하면서 주목받기도 했다. 추억은 생생하다. 지나간 일은 말이 없고 돌이킬 수도 없다. 지우고 싶다고 내 맘대로 지워지지도 않는다. 추억은 엄연하고 현실은 정처없을 뿐이며 삶은 건들마처럼 속절없다. 그래서 모든 흔적은 사랑이다. 그 흔적을 사랑하는 순간 희망이 생긴다. 가슴이 뛴다. 내 삶의 마디와 마디를 더욱 강건하게 한다. 내가 살아야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모든 흔적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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