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맹과니
청맹과니
  • 중부매일
  • 승인 2018.10.0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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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 클립아트코리아
/ 클립아트코리아

눈에 불을 켰다. 한참이나 서재를 뒤져도 보이지 않아 시력이 떨어졌나 하면서도, 찾는 것은 맨 나중에 나온다는 머피의 법칙일 것이라고 포기를 하지 못한다.

문화예술 지원 사업 신청 책자는 나 여기 있소 하고 고개를 쏙 내미는데, 정작 필요한 자금 신청 및 정산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책자로 되어있는 것은 은연중 중한 것으로 생각해서 잘 간직하고, 몇 장의 유인물로 되어있는 것은 버린 것 같다.

지금 어지르기 시합 중이냐고 농담을 하던 남편은 안 돼 보였는지 그만 찾고 다른 방법으로 하는 게 더 빠르겠다고 한다.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하면서 시스템에 들어가 보니, 유인물이 없어도 되는 것을 눈 뜬 장님 노릇을 한 것이다. 고정관념은 나이에 비례한다고 하던가.

가장 더웠던 지난여름 어머니께서 진짜 보양식 집이라며 토종닭 집을 말씀하셨다. 자신의 기억력이 의심스러운 판에 정확하게 기억하시는 게 고맙고, 당긴다는 말씀 같아서 먼 길을 찾아 나섰다. 맛있게 먹었는데 뱀이 썩어 구더기가 생기면 그것을 먹여 키운 토종닭이라 비싸다는 말을 듣고 토악질이 나왔다.

원효대사가 당나라 유학차 가던 중 밤중에 목이 말라 옆에 있는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더없이 좋았다고 한다. 날이 밝아서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구토를 할 것 같았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것을 터득하고 발길을 신라로 되돌렸다고 한다.

비슷한 경험을 하고도 대사는 도를 터득했는데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음은 우주 속에서 한낱 티끌에 불과한 작은 존재이기 때문일지.

하긴 물을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같은 물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는 게 이치인데 크게 깨달은 대사님의 일화를 떠올림이 불경한 일인지도 모른다.

더 가관도 있다. 그날 양복을 받아 걸려고 보니 입으라고 권했던 고급 양복이 그대로 걸려 있다. 아차 싶어서 받아든 양복을 보니 얇은 가을 옷이다. 모르면 돈을 많이 주라는 옛말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며 역시 비싼 옷이 태가 난다고 너스레를 떤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문학상 수상자는 가족이 같이 참석하라니 동행할 남편한테 따뜻하고 폼 나는 순모 양복을 입을 것을 권했다. 퇴직을 하고 큰 수술로 10킬로그램이나 빠진 남편이 아내 일에 같이 가는 것도 썩 달갑지 않을 텐데 동행하는 게 고마웠다. 그런 그를 이 기회에 어떻게 소개해서 자존감과 용기를 북돋을 것인가 골똘히 생각했다. 듣는 사람들이야 팔불출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런대로 잘했다 싶었는데, 이제껏 하지 않던 실수를 한 것이다. 옷 잘 입은 거지는 밥도 먼저 얻어먹는다는데 겨울에 가을 양복을 초라하게 입게 했으니, 청맹과니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노릇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눈을 청맹과니라고 한다. 사리에 밝지 못하여 눈을 뜨고도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은 부언을 해 놓았다. 그게 바로 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맞는다는 듯 길 위의 만남이 증명을 했다. 그냥 평소 다니던 길로 갔으면 좋았을 것을 질러간다고 샛길로 접어들었다. 아는 길이라고 내비게이션도 작동을 안 했는데 생각과는 다른 엉뚱한 길이 나왔다. 약속 시간이 걱정되어 행인에게 길을 물으니 반대 방향이라고 해 간신히 차를 돌려 나왔다. 땡볕에서 한참을 기다린 그분한테 미안해서,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공간지각 능력이 떨어지지 않느냐고 동조를 유도하며 길치임을 자백했다.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마침 신호등에서 멈추는데 건너는 보행자가 보였다. 지팡이로 길을 두드리며 가는 것으로 보아 앞을 못 보는 것 같은데 걸음걸이가 느려서 시간 내 건너갈까 불안하다. 신호가 바뀌기 전 정확하게 길을 건너는 그를 보면서 눈을 뜨고도 제대로 못 보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성철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심(心) 자 한 자로 요약하셨는데.

세월 앞에서 우리는 시든 꽃이 되기보다 고운 단풍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사람이 완벽하면 매력이 없지 않으냐 숨 막힐 것이라는 등 농담을 하며, 허울에 씌어서 실체를 보지 못하니 멀쩡한 청맹과니가 아니랴.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명의 어디 없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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