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뒤집혀도 자다가 깨어나는 법이 절대 없으며 남몰래 다이어트를 시도해도 눈꼽만큼의 효과가 없었던 내가 자그만치 십여킬로그램이 빠질 정도로 몇 번씩 잠을 설쳤던 시기는 바로 갓 어린아기를 돌볼 때였다. 정신이 혼미하고 몸이 천근만근이고 눈꺼풀이 쉼없이 쳐져도 어린 아이에게 집중되는 내 안의 모성의 괴력은 타인처럼 낯설어보였다. 아이에 대한 돌봄의 노동이 다소 동물적이라면 가족들과 노인에 대한 주부들의 서비스노동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훈련된 의무적 습성에 가까운 것일것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약한 자를 따뜻하게 보살피고 지원하는 돌봄의 노동은 여성들에겐 생명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게다가 육아와 노동력 재생산노동, 노인부양이 가정내 주부의 역할로만 강제되어온 사회환경에서 이에 무심한 여성은 모성이 없거나 효심이 부족한 여성으로 치부되기 일쑤고, 어김없이 남자들은, 그 옛날 조건없이 업어주고 쓰다듬어주고, 노인들의 똥오줌 가려내며 봉양했던 어머니들에 대한 그리움을 읊조리며 세태한탄을 하며 호들갑을 떤다.
 상당한 부분이 사회화의 영향이라고 믿는 내 눈에도 여성만의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형성되는 생명과 약자에 대한 본능적 감수성은 남성에 비해 훨씬 민감해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직간접적 경험의 공유를 위한 집중과 몰입에 따라 남여의 차이는 점점 줄어듦을 볼 수 있다. 태교와 출산의 경험을 함께한다거나 딸을 낳은 순간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는 어느 아빠의 고백담, 육아의 권리를 누려보기 위해 노동시장에서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근무조건의 변형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아빠들의 모습에서 가부장제에서 철저히 억압되어진 부성의 본능과 욕구를 감지한다. 눈물을 흘리거나 아기를 돌보거나 쫌스럽거나 수다스러움이 남자답지 못하다는 통념을 생산해온 가부장적 문화기재속에서 남성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유로운 본성표출과 돌봄의 노동이 상당부분 봉쇄당해왔다고 할 수 있다.
 복지사로부터 들은 또 하나의 사례는, 전직 교사였던 한 여성이 치매걸린 시어머님 봉양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30여년간 봉양을 해왔는데 노인이 돌아가신 후, 그 여성은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되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할 지를 판단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아노미 상태로 전락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돌봄’의 노동은 사람의 생존권, 인권, 사회권에 있어서 필수적인 노동이고 그 자체로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 사회적 존재인 어린이와 노인, 병자, 장애인등을 돌보는 일이 가정내 개인, 특히 여성의 몫은 아니다. 남녀가 분담하고 공보육, 공적 서비스 확충등을 통한 사회분담 시스템을 갖추어야하고 이를 위해선 우선 사회전체가 돌봄마인드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해체되고 출산율이 떨어져 궁극적으로 사회존속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간 부분적 구휼에 그쳤던 가족지원정책도 향후, 남녀가 사회적 생산노동과 돌봄과 가사노동에 함께 참여해 남성의 부성권리와 여성의 사회적 노동권 확보를 함께 꾀해내는 것이 가족정책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현재의 성별역할분담 형태를 대다수가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할 지라도 우리는 말한다. “올바른 정책이란 다수의 생각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돌보는 노동의 체험을 공유하고 인간적으로 사회화 시키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온전함을 회복시키는 일이며 이는 결국 진정한 효율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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