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지붕엔
초가지붕엔
  • 이지효 기자
  • 승인 2018.11.08 17: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1967년 덕산면 방골 / 김운기 작가
1967년 덕산면 방골 / 김운기 작가

둥싯둥싯 보얗게 박이 열렸다.
열일곱 하얀 박꽃, 수줍은 새댁이

비바람 모진 삶의 여정 견디며
한발 한발 세월의 사다리 딛고
어머니, 갈빛 완숙한 결실로
초가지붕에 함초롬히 앉아 있다.

보리쌀 빡빡 문질러 씻던,
모내고, 벼 베며 들녘에서
아욱국에 밥 말아먹던,
맑은 샘물 퍼 올리던
바가지, 그 정겨운 꿈이
지붕 가득 주렁주렁 영글었다.

 

가을비 반짝 빗줄 긋는 사이에 화들짝 놀란 단풍이 우수수 소란을 떤다. 들녘에서 가을걷이 하는 일손이 바쁘다. 마을 안팎이 모두 동동거린다. 된서리 내리기 전에 결실을 거둬들여야 한다. 박을 따러 방골 할머니가 지붕에 올랐다.

달밤에 하얀 박꽃처럼 청초했던 열일곱 소녀가 세월을 하얗게 이고 박을 딴다. 비바람 모진 삶의 여정 견디며 한 발 한 발 사닥다리를 딛고 오른 그녀가 그대로 하나의 박 덩이로 앉아 있는 거다. 쪽진 머리에 무명치마저고리를 입고 앉은 어머니가 꽃보다 더 곱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늙는 것이 아니라 익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랬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역사의 소용돌이, 그 어려움 속에서도 굳세게 가정을 지키며 어머니란 이름으로 박처럼 익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출가를 앞둔 큰 손녀딸 살림밑천으로 당신의 몸을 내어줄 참이다. 1960~1970년대 당시는 바가지가 부엌살림으로 꼭 필요했었다.

박은 버릴 게 하나도 없다. 달빛 시리게 하얀 꽃을 피워 밤새 어둠을 밝히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등불을 끈다. 어린 과육은 길죽길죽 잘라 박고지를 만들거나 나붓나붓 썰어 자박하게 김치를 담그기도 한다. 하얀 속살은 나물을 해 먹는다. 잘 익어 단단해진 박은 반으로 잘라 속을 파낸 후 삶아서 바가지를 만들어 썼다.

박 바가지는 크기도 모양도 상관없고, 못생겨도 괜찮다. 제 그릇 크기만큼 다 요긴하게 쓰인다. 종그래기 만한 바가지는 장독대가 제 집이다. 간장독에 동동 띄워 놓고 장을 덜어 뜰 때마다 쓰인다. 됫박만 한 것은 물바가지로 사용하거나, 보리밥에 열무김치, 고추장 넣고 비벼먹을 때의 그릇으로 제격이다. 모내기 할 때나 벼 베는 날, 들녘에서 여럿이 둘러앉아 아욱국에 밥 말아 먹던 바가지의 맛과 멋은 더할 수 없이 정겨운 모습이다. 표주박에 따라 마시던 막걸리의 흥취 또한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내가 결혼하던 날이다. 와병 중이던 시아버님이 결혼식장에 오시지 못했다. 부득이 폐백을 집에 가서 드리고 난 후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다. 나무로 된 대문을 들어서면 앞마당을 거쳐 안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시댁 어른들은 신랑 새댁을 곧장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뒤란으로 인도한다. 부엌 뒷문으로 들어가게 하더니 부엌에 박 바가지를 엎어 놓고, 밟아 깨뜨리고 지나가란다. 영문도 모르고 고무신 신은 발로 힘차게 밟아 와자작 깨뜨렸다. 바가지 깨지는 소리에 잡귀가 물러나고, 온갖 부정한 것을 다 없앤다는 액막이였다.

이렇듯 바가지는 우리 민족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왔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도 호박과 더불어 박 넝쿨이 집집의 담장과 초가지붕을 덮었다. 사진작가 김운기 선생이 만난 1967년 사진 속 방골 모습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흔하게 보아 왔던 풍경이 이제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 속 전설이 돼 가고 있다. 보여주기 위해 심어놓은 포토존의 조롱박터널이 전부로 알고 있는 아이들, 그들에게 박 바가지는 수업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학용용품 쯤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길 위에 은행잎이 노랗게 융단을 깔아 놓는다. 가을이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