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한병선 문학박사·교육평론가

공존(共存)과 상생(相生)이라는 공동체 덕목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대부분은 공존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상생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개념이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전자는 단순히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인 반면, 후자는 서로를 북돋우며 시너지 효과(synergistic effect)를 낸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간 적대적인 감정을 포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양오행과도 관련성을 갖는 철학적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보자.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 이들 물질들은 하나의 통 안에서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공존농도라는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는 서로 섞이게 된다. 사회현상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 간에도 이런 원리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공존을 넘어 상생으로

우선 공존의 문제를 보자. 이 문제를 국가적인 관계로 확장시킨다면 상호간 평화공존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이 항상 상생적인 관계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다만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관계가 유지되는 상태다. 예컨대 '평화공존'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관계다. 공존은 경우에 따라서는 상극의 관계에서도 가능하다. 남북한 간의 관계는 좋은 사례다. 지금까지 그랬다. 상호간에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군사적, 이념적 갈등을 지속해왔다. 북한이 도발하면 남한은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북한은 이에 호전적으로 맞서는 악순환을 거듭해왔다. 서로 반목하고 불신하며 상호간의 발전을 저해하여왔다. 이런 속에서도 남북한은 공멸하지 않고 그런대로 지금까지 공존해온 형태다.

상생은 이보다 훨씬 다층적이다. 앞서 거론했듯이, 물질이 섞이기 위해서는 특정한 상황과 조건이 필요하다. 물질계에서는 이런 조건만 만들어지면 공존농도가 되지만 인간계에서는 훨씬 복잡해진다. 전쟁과 갈등이 쉽게 발생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상생은 윈윈(win-win)하는 관계다. 단순히 공존하는 관계를 넘어서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를 말한다. 존재 그 자체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상호발전을 도모해가는 상생이다.

인류가 지향하는 가치는 상생적인 삶이다. 갈등과 반목이 아닌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존중하는, 국가와 국가가 서로를 인정하는 모습을 원한다. 이런 인류의 목표는 '보편성(universality)'과 맞닿아 있다. 이런 점에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성은 국가나 민족, 혹은 집단 간의 단순한 공존이 아닌 '상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로 요약할 수 있다.


#'공동선'을 위한 상생의식 필요

가톨릭의 사회교리에 의하면, "세계는 상호의존과 필연적인 연대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세계의 모든 국민과 민족 사이의 상호의존 관계가 더욱 긴밀해져 가는 이 시대에 세계의 '공동선(common good, catholicity)'을 적절히 추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모든 민족 공동체는 현대의 임무에 부합하는 질서를 스스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신을 공동체로 이해하고 개인과 민족의 차이를 관대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다양성을 풍요로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갈수록 서로의 관계와 의존성이 커져 가는 상황에서 필수불가결한 진리와의 연대성, 자유 등의 가치가 모든 공동체 내에서 더욱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한병선 문학박사·교육평론가
한병선 문학박사·교육평론가

이런 '보편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상생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인류가 반드시 만들어야 할 상생의 삶에 비추어, 우리 민족과 남·북한 간의 관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편성의 실천이 곧 상생으로 가는 길이다. 2019년 기해년(己亥年)에는 남과 북이 공존을 넘어 상생의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