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소수민족들의 삶에 측은지심을 유발한 적이 있었다. 수천㎞의 아찔한 협곡과 5천m이상의 설산(雪山)을 말 등에 차와 소금을 싣고 넘나드는 것이었다(茶馬高道). 생사고락을 감내하면서까지 차가 필요했던 그들의 가파른 여정은 구름에 낮달 흐르듯 순응하는 자연을 닮아있었다.

그 생존의 여운은 좋은 차를 마셨을 때 목구멍에서 용솟음치는 회감(回感)처럼 내 가슴을 충동질했다. 녹차처럼 고소하거나 살갑지도 않고 청차처럼 상쾌하거나 화사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홍차처럼 붉고 화려하지도 않다. 마치 오랜 시간 사람과 함께 생활해온 차의 땀 같았다. 진향이라는 포장을 겹겹이 쓰고 흑차의 어른 흉내를 내는 보이차 와는 또 다른 이질적 향미를 찾아 광서성으로 향했다.

소개받은 오주(俉州)의 무골 차창은 상상외로 깨끗했다. 봄, 가을로 두 번 수확하고 자색찻잎을 상품으로 친다는 육보차 제다과정을 영상으로 보고 육우가 저술한 '다경'의 존재가 새삼 떠올랐다. 더 놀란 것은 레미콘처럼 생긴 기계에 찻잎을 넣고 자동으로 악퇴 시키는 일이다. 발효실이라는 명패 아래 바닥에 찻잎을 쌓아두고 물을 뿌렸던 그동안의 미비하고 불결했던 악퇴 과정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양생의 차로 세계인들에게 회자됐던 흑차의 문제점이 이로써 해결된 것인가.

진시황의 통일 후 계림군(桂林郡)의 전부, 남해군(南海郡)과 상군(象郡)의 일부가 현재의 광서성(廣西省)이다. 중국명차도보의 기록으로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육보차는 오주시(俉州市) 창오현(蒼俉懸) 육보향(六堡鄕)에서 생산되어 육보차라 한단다. 1953년 중국정부의 특산품으로 운영해왔다. 그러나 차 산업의 발전이 소수민족들의 기름진 생활 터전이 된다는 것을 헤아린 중국은 2004년부터 민간이 운영하게 했다. 지금은 세계 유럽, 동남아로 수출한다며 자랑 질이다.

맑은 등황빛의 탕색에 맛과 향기가 오묘하다. 축축한 나무 내음, 낙엽 타는 내음, 불 향기, 숲 향기, 바다향기. 우주의 걸쭉한 향들이 진한 꿀 되어 올라온다. 목향, 진향, 과향, 빈란향, 요향 등이란다. 낮 설은 그윽함이 묵은 장맛처럼 편안하다. 오래될수록 맛이 깊어진다는 월진월향(越陳越香)이란 의미가 새삼 놀랍다. 신선함을 유지해야 차다운 차로 인정받았던 그 한계를 뛰어넘은 차의 예술이다. 차의 유효기간이 짧은 비 발효차의 기술만 있었다면 오늘날 차 문화라는 존재가 살아있을까?

정지연 원장
정지연 원장

여린 맛을 즐기고 싶은 혓바닥의 욕정과 차를 이용해 건강을 유지하고 싶은 인간의 지혜가 후 발효차를 만들어냈다. 햇볕에 그을리고(萎凋), 불에 덖고(殺靑) 비비는 과정을 지나 악퇴(渥堆)라는 차의 과학에 돌입한다. 그것들은 대광주리에 담겨 오랜 시간 서늘한 곳에 갇혀있어야 한다. 고진감래의 시간이랄까. 잡다한 세상의 소리를 등지고 사는 은자처럼 어두운 지하에서 맑고 고운마음만 키워 낸다. 고요함 속에서 신비로운 향기를 품어낼 때 비로소 인간과 소통할 수 있다.

유리 상자에 들어있는 100년 넘은 육보차는 마셔보지 못했다. 그러나 알 것 같다. 분명 사람이 녹여낸 차의 애고(愛苦)일 것이다. 톡톡 튀는 청춘에서 안락함이 지속되는 갈색의 중후함이다.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여는 청년들의 열정. 들쩍지근한 맛과 노련한 향기. 이 무근하고 편한 향미가 소수민족의 삶으로 전환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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