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연암 박지원은 1780년에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향한다. 북경을 경유해 건륭제가 머무는 열하에 닿는다. 한양을 떠나 그곳에 다녀온 일수가 한달 남짓. 그간의 기행문을 열하일기로 남긴 일은 주지의 사실이다.

열하일기는 당시의 고루한 문체에서 벗어난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문장으로도 유명하다. '양반전'에서 허위의식에 찬 양반을 조롱하며 기만적인 현실을 풍자할 때의 힘이 실려 있다. 개혁을 꿈꾼 정조는 보수적인 면도 많아 그 문체를 싫어했지만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낸 명작임에 틀림없다.

연암을 포함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의 북학파들은 부조리한 사회를 못 견뎌하며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려 애썼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나간지도 오래 된 시절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는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경직된 성리학의 폐단 속에 뒹굴고 있었다. 정조 시대엔 나아진 면모도 보였지만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낙후성이 상당히 극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시대상황 속에 북학파들은 사회 개혁과 더불어 청의 문물과 청에 유입된 서구 문물에 열망했다. 청의 수도인 북경에 가길 동경했으며 북경의 번화가인 유리창은 일종의 산소호흡기였다.

그 무렵에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로서 나름의 답답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난학이 작게나마 꽃피고 있었다. '해체신서'가 발간된 해가 1774년이다. 해부학에 관한 책으로 독일 원전의 네덜란드 판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그 이전부터 싹트던 난학에 큰 획을 그었다. 난학은 양학의 바탕이 되며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씨앗이 된다.

북학파와 난학이 단순하게 비교될 성질은 아니다. 북학파가 성리학을 자양분으로 해서 그 너머를 꿈꾸며 사회 개혁을 위한 진보적 사상 운동의 총체라고 본다면 난학은 실용적 과학 기술에 치중한 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두 운동은 당시의 조선과 일본에서 일어난 중요 사건들이다. 두 나라는 그 이후에 국운이 정반대로 바뀌어간다.

열하일기가 쓰여지기 훨씬 이전인 1719년에 '해유록'이 쓰여졌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조선 선비 신유한의 일본 기행문이다. 일본에 관한 책자가 조선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 역시 일본에 꾸준히 다녀왔기에 그것만으로도 일본에 대한 정보는 정도가 문제지만 조선에 있었다.

순전한 주관적 생각이지만 연암을 포함한 북학파들이 일본엔 약했다고 내겐 보인다. 결과치를 기준으로 해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이 바람직하진 않음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전범국이기에 위험요소로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일본에 난학이 태동하는지 어떤지 정보 단절이 강한 시기이기에 알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관심을 가졌더라면 안테나에 잡힐지도 모를 일이다. 서양 문물의 매혹과 공포가 청의 문물과 국내에 유입된 기기들로 인해 서서히 알려지던 무렵이었다. 좋든 싫든 세계사의 어쩔 수 없는 기류이다. 동양 사회는 그 위험 앞에 향후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해야 한다.

청나라도 그 이후 아편전쟁으로 무너진다. 일본의 서구 문물에 대한 과감한 개방은 근대화 이후에 제국주의로도 나갔으니 극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국운을 뒤흔드는 지각변동의 사건들이 한중일에도 뒤따른다. 북학파는 당대 조선의 한계에서 벗어나 이용후생의 개혁을 위해 몸부림친 훌륭한 운동임에 틀림없다. 연암 역시 훌륭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다만 당대의 재야 지식인으로서 최고 반열급에 속하는 분이기에 시야를 동아시아 전체로 넓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답답한 현실 속에서 희망고문인듯 가져본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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