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융조 교수의 문화재 발굴 뒷얘기

더욱이 우리를 힘들게 했던 것은 초겨울서부터 겨울방학 내내 발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고 보니 여러 가지로 악조건 속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는 예산의 문제요, 둘째는 겨울이라 작업 시간이 단축되면서 곧잘 땅이 얼어서 작업 능률이 여름의 1/3밖에 되지 못하였다는 점, 그리고 점차로 학생 동원이 어렵게 된다는 점 등이 우리 발굴을 힘들게 하였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믿음직스러운 노병식 선생(당시 고고미술사학과 조교)이 발굴현장을 맡아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름만 나열한 노병식 선생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그는 보은 창리 출신으로 선배들인 홍순두(역사교육과 졸)ㆍ이윤석(사학과 졸)님들과 함께 “보은 3총사”로 불릴 만큼 힘이 장사였는데 궂은 일을 다 도맡아서 하였다.

특히 수양개 3차 발굴인 겨울 발굴(1984)에는 1학년 때인데 이때부터 참가하여 다른 많은 발굴 대원들을 제치고 가장 힘든 일만 골라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되는 구낭굴 발굴이나 곡천 발굴에도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밝은 낯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곤 하였다. 그래서 곧잘 ‘노지심’이라고 불리우는 별명이 싫지 아니하였고, 자신을 잘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말을 들을 때 마다 즐겁게 웃곤 하였다.

더욱이 육군 장교로 제대한 바로 그 해 일산 가와지 발굴(1991)에서부터 힘든 토탄발굴 작업에 2~3사람 몫을 너끈히 하여 주었고 언제나 힘든 여러 대원들을 이끌면서 발굴을 추진하곤 하였다.

이렇게 하는 발굴 과정에서도 남다른 관찰력으로 이미 주암댐으로 발굴된 곡천유적 3지구를 찾고 최근에는 청주 봉명동 1지구ㆍ진천 송두리유적ㆍ오송유적 등의 백제 유구층 밑에서 구석기문화층을 확인하게된 것은 그의 정확한 선사문화에 대한 감각과 구석기 문화에 대한 식별 능력이 없었다고 한다면 모두 다 없어져 버렸을 그런 유적들이었다.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발굴되는 많은 구제발굴 유적에서 어디 노병식 선생만이 발굴하는 지점에서 구석기유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필자 자신도 문화재 조사를 전담하는 재단을 만들고 있지만 젊은 친구들이 현장 책임자로 가지고 있는 고고학도로서의 임무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궁평리 조사로 얘기로 돌려보자. 대원이 모자르다 보니 공주 석장리의 30년 전 친구들을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석장리 사람들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64년도부터 석장리 구석기유적 발굴에 관계를 맺은 이후로 매년 발굴 작업에 종사했고 더욱이 필자와는 같이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필자의 발굴 방법과 스타일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께 연락하였고 석장리 사람들도 흔쾌히 발굴에 참여 하였다.

이때 석장리에서 15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가하다 보니 석장리에서부터 출퇴근하는 발굴방식으로 진행되었다. 40년 이상 고고학 발굴에 책임자로 일해 온 필자이지만 출퇴근으로 발굴방법을 행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격세지감으로 느끼었으나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발굴이 진행되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많은 유물을 찾게 되었는데 우리가 처음 발굴계기를 만든 가마터를 1호 가마터라고 하고 여기에 집중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많은 성과를 얻게 되었으며 이 가마터에서 볍씨(자포니카)를 찾아서 가마터의 역할과 기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또한 입이 약간 벌어지고 배 부분이 볼록하고 밑바닥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일반적으로 불리워지는 ‘송국리형 토기’를 찾아 복원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연구 성과 중의 하나였다.

점진적으로 유적을 확대하다 보니 경작 행위로 이미 움터가 없어진 채로 남아 있는 유구를 확인할 수 있어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근거지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궁평리유적의 고고학적 의미를 찾게 되었다.

발굴을 진행하면서 전혀 뜻밖의 움터가 나왔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집터였고 여기서는 아주 질 좋은 청자잔이 발굴되어 궁평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사람들과 고려시대 사람들이 같이 발굴된 유적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고 보니 발굴 보고서가 종합 보고서의 성격을 띠게 되고 여기에 여러 관계학자들과 연구를 같이 진행하여야 할 터인데 이미 발굴비는 발굴 면적의 확대와 발굴 기간의 연장으로 이미 바닥이 난 상태라, 보고서 작업 추진이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 충북대학교 박물관장ㆍ한국선사문화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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