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기해년과 경자년이 경계선에서 바통을 터치 중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방송 연예예술인들의 시상식이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다. 한 해의 마무리와 시작의 타종이 울린다. 지난해의 나를 돌아본다.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무언가 새로운 결심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새해를 맞을 때는 늘상 그랬다. 새해 들어 첫 번째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겠다고 새벽 찬 공기를 가르고 산을 올라본 적도 여러 번 있다. 진천에서는 백곡저수지 둑방을 비롯하여 태령산, 두타산, 봉화산, 엽둔고개 등 여러 곳에서 해맞이 행사가 진행된다.

올해는 느긋이 늦잠을 즐기기로 했다. 가만히 있어도 어련히 알아서 해가 떠오를 터인데 그 새를 못 참고 찾아 나서나 싶기도 하고 그가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리자는 심산이 작동했다. 좀 더 여유롭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서였을지도 모른다. 느지감치 눈을 뜨고 창문을 열었다. 빈 나뭇가지에 하얀 눈이 그림처럼 앉았다. 쌓이지는 않았어도 서설임이 분명하다. 경자년을 하얀 쥐의 해라고 하지 않는가. 첫날 첫새벽에 하얀 눈이 찾아온 데는 다 의미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싶다. 흰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얼마나 설레었던가.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내달렸던 어린 날의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볼에 닿는 찬바람이 싫지 않다.

매서운 바람에 주위가 꽁꽁 얼어붙는 날이면 마을 앞 논바닥은 썰매장이 되었다. 벼 그루터기가 삐죽삐죽 솟아 있어 매끄럽지 않은 얼음판이지만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당시 썰매는 모두 자기 집에서 만들어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크기나 형태가 제각각이다. 둘이 탈만큼 커다란 널빤지 밑에 날이 잘 선 쇠줄을 박아 튼튼하게 만든 썰매도 있고, 겨우 저 혼자 앉을만한 크기에 철사를 박아 만든 썰매도 있다. 두세 살 터울로 오빠가 있는 애들은 오빠가 태워주는 썰매에 앉아 잘도 달린다.

꼬챙이로 얼음 바닥을 힘껏 찍으며 빠르게 손놀림을 해야 속도가 붙는다. 엉거주춤 선 채로 힘차게 꼬챙이를 찍어대면 썰매는 씽씽 신바람을 낸다. 그런 모습을 먼발치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가장자리에서 사부작사부작 혼자 놀 때가 많았다. 하나 밖에 없는 오빠나 언니들은 나하고 터울이 커서 같이 놀아줄 형편이 아니었다.

남자애들은 초등학생이라도 저희들끼리 뚝딱뚝딱 썰매를 만들기도 했다. 어설픈 손놀림으로 못에 마치질을 하다 손을 찧는 일이 대수였겠는가. 어떻게 하면 잘 나가게 할까 고민하며 신나게 창의성을 발휘하였으리라. 썰매가 없으면 서로 빌려 주기도 하고 손으로 끌어주며 얼음지치기를 즐겼다. 학교 갔다 오면 노는 것이 일상이었고 방학 때는 아예 공부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학원이란 것이 있는 줄은 더더욱 모르던 때의 이야기이다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동안 지금의 아이들 환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요즈음 부모들은 아이들이 아무 생각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살아갈 수 있도록 다 챙겨주고 있다. 젓가락질을 못하면 포크로 떠 먹여주고 친구랑 다툼이 일어나거나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으면 단숨에 쫓아가 혼을 내준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공자님의 말씀일 뿐이다. 아이들은 무엇이 잘못인지 생각할 기회조차 없는 게 요즈음의 현실이다.

지저분한데서 놀면 병균 묻을까, 옷 버릴까 함부로 놀지도 못한다. 아니, 놀 시간이 없다. 학교에서 이 학원 저 학원 들려 집에 오면 저녁이다.

공부는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점수가 올라간다. 점점 로봇이 되어가는 거다. 부모님이 누르는 버튼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로봇이다.

놀이도 수업의 일환으로 따로 시간을 내어 논다. 전래놀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시간 또는 방과 후 활동으로 편성하여 가르치고 있다. 노는 방법, 규칙, 벌칙도 모두 놀이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정해진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 어렸을 적에 학교 갔다 오면 책보 팽개치고 동네 친구, 언니, 동생들과 천둥벌거숭이처럼 뛰놀며 하던 놀이 아니었던가. 사방치기, 자치기, 고무줄놀이, 어떤 놀이든지 아이들끼리 편을 짜고 규칙을 정하였다. 때때로 의견이 맞지 않아 치고받고 싸움이 일기도 했다. 찔찔 울면서도 그들 틈에서 함께 하려 했다.

그 속에서 물러설 줄도 알고 맞섬을 조절할 줄도 알았다. 약한 동생들을 돌보아 주기도 하고 악착같이 언니들을 따라하려 했다. 보고 배우며 스스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성과 사회성은 덤으로 얻어졌다. 자연과 함께 스스로 깨쳐 성장해 온 우리들의 자화상이 주르륵 썰매를 탄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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