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오랜 만에 고향에 왔다. 고향은 언제나 와도 좋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라서 그럴까. 너무도 많이 변했지만 구석구석 어릴 적 추억이 알알이 박혀 있다. 청춘의 이상으로 서 있던 앞산의 소나무, 가재 잡고 멱 감던 앞도랑, 돌담이 병사처럼 줄지어 호위하던 고샅길. 발 닿는 곳마다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고향집 마당에 서 본다. 마음은 동심으로 돌아간다. 저기에 감나무가 있었지. 여기에는 외양간이 있었고, 아, 그래 저쪽에는 담배 건조실이 있었고, 우물이 있었고, 사립문 밖에는 두엄간이 있었지. 비 오면 질퍽거리고 눈 오면 쓸어야 했고, 왜 그리 풀이 많았던지 늘 뽑아야 했지.

기억 창고에 묻어두었던 추억의 파편들이 스멀스멀 목구멍으로 올라온다. 두리둥실 떠다니는 생각들이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서 있는 나는 영화감독이고, 마당은 무대가 되고, 추억은 각본이 된다. 각본은 짜여 진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각본이다.

초가집을 부수고 기와집을 지을 때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 이 마당은 흙 마당이었다. 난 그때 잘 곳이 없어서 아랫집에서 잤다. 마당 한가득 질펀하게 나무을 실어와 쌓아놓았다. 이웃동네 목수가 와서 자로 재며 썰고 대패질을 했다. 설계도도 없이 기둥이 세워지고 서까래가 올라가고, 드디어 지붕 위에 기와가 놓일 때 콧노래가 나왔다. 아, 내가 이런 기와집에서 살게 되다니! 기분이 너무 좋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마당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십리 길 학교를 갔다가 오면 마당은 고요하다. 배는 고픈데 집에는 아무도 없다. 어머니는 보나마나 밭에 나가셨다. 다짜고짜 난 부엌으로 들어간다. 어머니는 자식들 배고플까봐 늘 부엌 찬장에 밥과 반찬을 마련해 두었다. 그냥 부뚜막에 앉아 먹는다. 너무도 배고프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보리밥에 찬밥이라도 장아찌를 얹어먹으면 그대로 꿀맛이다. 한여름 더운 날엔 찬물에 말아 먹어도 맛있다.

배를 채우고 부엌에서 나오면 어김없이 마당엔 멍석이 깔려 있다. 멍석 위에는 고추며 잡곡들이 널려 있다. 문제는 여름철이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면서 소나기를 퍼부을 때가 있다. 어린 나는 무슨 철이 있었는지 멍석을 반으로 접어 응급처방을 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가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마당에서 땡볕에 타작을 한 것은 뜨겁고도 아린 추억이다. 마당 돌담 옆으로 짚단가리가 산처럼 세워져 있었다. 타작을 할 때 나의 주된 임무는 짚단을 나르는 일이었다. 타작은 아버지와 형님이 도맡아했다. 보리는 수염이 있어 송곳처럼 살갗을 찌르고, 볏단은 흐느적흐느적 하여 어린 나의 힘을 쭉 빼고야 말았다. 그래도 신났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짚단을 베고 누어 하늘을 보기도 하고, 짚단가리에 몰래 숨어 술래 놀이도 했다.

지금 마당은 시멘트가 깔려 있다. 옛날 맛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감나무가 서 있던 자리도 알 수 없고, 담배 건조실과 외양간은 창고가 되었다. 돌담도 사라지고 도랑가에 있던 밤나무와 머위 풀은 흔적조차 없다. 이렇게 무상할 수가! 무상을 넘어 매정이 엄습한다.

마당에서 세 번의 상을 치렀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할머니와 아버지는 마당에서 오래 머무셨다. 상여가 차려지고 동네 사람들은 밤을 샜다. 곡소리가 마당을 휘돌아 앞산 소나무에까지 울려 퍼졌다. 그렇게 슬펐다. 그 추운 겨울, 아버지를 실은 관이 안방에서 나와 상여에 올려 질 때, 나는 마당에서 엉엉 울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가 정말 가시는구나. 이제 가면 아주 못 오시는구나. 아버지는 당신이 지은 흙담집을 벽돌로 개축하고는 일 년도 채 못 살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그래도 좀 사셔서 시내 병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때만 해도 벌써 시대가 많이 바뀐 탓이다. 그래도 아쉬워 상여를 마련했다. 어머니가 스무 살에 시집 와 평생을 디디고 살던 이 마당, 자식 오남매 키우며 눈물을 절였던 이 곳 마당을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마당에서 한참을 머물다 상여는 산으로 향했다. 어머니 가는 길에 하얀 딸기 꽃은 어찌 그리 피어있던지. 어머니는 그렇게 이 마당과 이별했다.

마당은 그대로다. 단지 변했을 뿐이다. 고향에 오면 그래도 마당이 있어 좋다. 마당에 서면 나는 영화감독이 되어 아련한 추억을 무대에 올린다. 순간 마당에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님이 등장한다. 외양간에는 소가 여물을 먹고, 지붕에는 감이 뚝뚝 떨어지고, 도랑에서는 잔잔한 물소리가 들린다.

 

■프로필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2006년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부회장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수필집 '삶을 일깨우는 풍경소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