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올 들어 첫 나들이 길에 올랐다. 청풍문화재단지다. 봄의 탄생을 앞두고 만삭의 몸으로 막바지 한기를 견디고 있는 모습에서 품격이 느껴진다. 이곳은 1978년 충주다목적 댐 건설로 인해 제천시 청풍면을 비롯해 5개면 61개 마을과 충주시 일부가 물에 잠기게 되면서 문화재단지로 조성된 곳이다. 보존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아 보물, 문화재로 지정하여 옛 모습대로 재현해 놓았다. 잊혀져가는 풍물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반가움도 있지만, 청풍은 우리 집안의 본향이기에 내게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35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영루, 조선시대 청풍부의 관문으로 들어섰다. 금남루, 응청각, 금병헌 등 건축물을 통해 옛 관아의 형태를 엿볼 수 있고, 재현되어 있는 고가에서 정겨움이 느껴진다. 잎사귀 모두 떨군 채 아직도 빨간 열매를 다닥다닥 매달고 있는 산수유나무가 눈길을 끈다. 문물이 번성했던 옛 남한강의 기억을 간직하려는 듯, 한겨울 바람에도 굳건히 열매를 움켜쥐고 있는 의지가 가상하다.

보물 528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벽루에 이르니 충주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잠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처음 수필교실을 열던 때가 물결 따라 일렁일렁 다가온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모여든 계곡물이다. 속으로 삭이며 저를 다스려온 여정이 읽힌다. 계곡을 흐르다보면 온 몸이 하얗게 부서질 때가 있다. 절벽 아래로 고꾸라지고, 때론 소쿠라지며 기진해져 소(沼)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이 뭉클하다. 그래도 쉼을 멈추지 않아 여기에 다다른 강물, 물길 따라 흘러온 그들의 삶에 귀를 기울인다.

시새움 달에 한바탕 꽃샘 홍역이 돌았다. 산수유와 개동백이 먼저 용기 있게 열꽃을 피웠다. 이에 힘입어 움쭉움쭉 꽃잎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겉으로 열꽃이 오르면 이내 홍역은 잦아든다. 다양한 삶이 본격적으로 봄 동산에 이름을 올렸다.

쪼그리고 앉아 보아야 눈에 띄는 풀꽃, 꽃다지 제비꽃이 쑥스러움을 가득 안고 있다. 앙증맞은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머문다. 휘휘 둘러보면 그저 쉽게 눈에 띄는 벚꽃, 진달래 개나리는 어울려 핀다. 그들은 여럿이 어울려야 비로소 아름다운 꽃무리를 이루어 낼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일시에 손잡고 나선 거다. 떨어져 내리는 꽃잎도 춤추며 함께 하기에 그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다. 올려다 보이는 목련의 우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곁에 소소한 꽃들이 없다면 어찌 여왕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찬연한 봄날, 우연히 강가를 거닐게 됐다. 수필이 흐르는 강이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하나둘 만나 한 줄기 강을 이뤄 가는 곳이다. 그동안 혼자 피고 진 꽃무리에 비로소 눈길이 간다. 각자 이름을 갖고 있었겠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풀꽃, 그들을 수필이 흐르는 강가로 불러냈다. 용기 내어 처음 이름을 올린 이들이 글눈을 트고 동행이 됐으면 싶다.

이 세상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으랴,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그들은 누군가를 위해 쉼 없는 삶을 살아내느라 꽃인 줄도 모르고 이름도 없이 지내왔던 터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거울 앞에 웬 늙수레한 여자가 얼굴을 디밀고 빤히 쳐다보더란다. 소스라쳐 돌아보니 그게 자기 자신이더라는 말이 풀잎에 이슬처럼 맺힌다. 그랬다. 그들은 분명 꽃이었다. 자세히 보면 얼굴 한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꽃잎 하나 미소를 머금고 있다. 남 앞에 나를 드러내는 것이 떨린다면서 자신의 삶을 어색한 듯 수줍게 풀어내는 모습에서 사랑을 품을 꽃망울을 발견한다. 쪼르르 강가에 나앉은 그들의 마음은 벌써 풀꽃시계를 만들던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 온 얼굴에 해사한 꽃빛이 여울진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수필이 흐르는 강' 제5집을 앞에 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 모습은 여전히 수줍다. 무심하게 느꼈던 가족애를 마음으로 맞던 감동과 상기되어 아슴아슴한 어린 시절을 불러온다. 먼 길 떠나신 부모님을 만나 하얗게 밤을 밝힌 얘기며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한 작고 달달한 행복의 맛을 느낀다. 발길 멈추고 잠시 낮게 엎드려 풀꽃에 눈맞춤하며 잊고 있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하찮은 것에서 소중함을 찾아내는 눈썰미가 새롭고, 인연을 귀히 여기며 쉬 곁을 내주는 마음씨가 곱다. 속내 풀어 글로 형상화하는 솜씨는 맛나고 정겹다. 자애로운 여인의 맵시가 강물로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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