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현 칼럼] 한기현 논설위원

"한평생 아들로서 효를 실천했고,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했으며,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했다. 잘 있거라, 내가 사랑한 사람들아.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아"

코로나19 발원지인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 거주하는 50대 영화감독 창카이가 코로라 감염으로 죽기 직전에 남긴 유언이다. 창 감독과 부모, 누나 등 일가족 4명은 부친의 코로나19 확정 판정 17일 만에 모두 사망했다.

창 감독 부친은 지난 1월 25일 코로나19 확정 판정을 받았으나 병상이 없어 집에서 머물다 28일 숨졌다. 모친도 같은 병으로 지난달 4일 입원했으나 4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창카이 본인과 누나는 지난달 8일 코로나 증세가 나타나 동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발명 6일 만인 14일 사망해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창 감독은 유언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여러 병원에 갔지만 하나같이 병상이 없어 환자를 못 받는다고 했다.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병상을 구하지 못했다. 양친을 병 간호한 지 며칠 만에 바이러스가 무정하게도 나와 아내, 누나의 몸을 삼켰다"고 토로했다.

그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부모, 아버지, 아내, 친구와 동료들에게 담대한 말을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언은 미사여구 한 구절 없이 평소 인간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인생 철학을 진솔하게 표현해 오랫동안 모두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창 감독의 유언이 보도되자 SNS 등에는 "명사의 유언이나 묘비명과 다를 바 없으며, 특히 평범한 사람의 절절한 유언이기에 더 가슴에 와닿는다", "이런 비극을 알리고 책임을 묻고 싶다.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등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거나 열악한 의료 현실을 비판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유언은 죽음에 이르러 부탁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언이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태조 왕건은 '인생이란 원래 그렇게 덧없는 것이다"라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후고구려 왕인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유언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 부인인 이희호 여사는 "하늘 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유언보다는 묘비명을 남긴다. 묘비명은 사후에 죽은 사람의 성명, 신분, 행적을 무덤 앞 비석에 새긴 글이다. 당사자의 인생 철학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후세의 얘깃거리나 교훈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묘비명으로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버나드 쇼),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헤밍웨이), '고로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데카르트), '살았고, 썼고, 그리고 사랑했다'(스탕달), '에이 괜히 왔다'(중광스님) 등이 있다.

유언과 묘비명은 누구나 남기고 묘비에 새길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철학이 녹아있지 않은 유언과 묘비명은 그저 혼자 내뱉는 말과 글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평범한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은 유언과 묘비명을 남기지 못해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면 그 뿐이다.

오는 4월 15일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 중에서 후세에 유언이나 묘비명을 남길 수 있는 자격을 지닌 바른 정치인이 얼마나 될 지 궁금하다.

한기현 국장겸 진천·증평주재
한기현 논설위원

이번 총선에서는 이전 처럼 막말이나 인신공격, 신상털기, 흑색선전 등 비신사적인 선거운동을 그만하고 정정당당하게 대결해 코로나19 사태로 고통받고 있는 국민을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자. 유권자도 총선을 통해 구태에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인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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