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월인천강지곡 첫면
월인천강지곡 첫면

요즘 코로나 때문에 온 세상이 난리다. 방금 카톡이 왔는데 너무 웃겨서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 제목이 '확찐자'다.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으니까 살이 확 찐 자가 되었다는 유머다. 확찐자의 이동 경로는 식탁과 소파, 그리고 냉장고를 반복한다. 확진자와 확찐자는 그 뜻이 엄청 다르다. 하나는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으니까!

나도 집안에만 있으니 확진자는 아니더라도 확찐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회에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어 좋다. 그동안 훈민정음 공부를 위해 사 놓은 책을 다시 살피는 중이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저 알알이 박히는 글자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묻곤 했다. 영화 '나랏말싸미'가 그 궁금증을 더 자아냈고, 결국은 공부까지 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글이 참 묘미가 있다. 확진자와 확찐자, 겨우 '진'에 'ㅈ'자 하나 더 들어갔는데, 뜻은 하늘과 땅 차이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로는 맑고 흐림(청탁)의 차이다. ㅈ은 아주 맑은 소리(전청)이고, ㅉ은 아주 흐린 소리(전탁)이다. 그럼 ㅊ은 뭘까? 이는 ㅈ에 획을 하나 더한 건데 버금 맑은소리(차청)이다. 어떤가. 기막히지 않은가? 얼마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가 말이다.

영화 '기생충'이 그 유명한 아카데미 영화상을 휩쓸었다. 무려 네 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시상식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봉준호 감독은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말로 대부분 수상 소감을 밝혔다. 동시통역이 잘 된 덕분이지만, 사람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호응했다. 영어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말로 하는 걸 보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만방에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무슨 얘기냐 하면, 미국인들에게 기생충을 보게 하려면 영어로 자막 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들은 자막 읽는 것을 매우 골치 아파한단다. 아니, 우리는 외국 영화를 볼 때 어떻게 보는가? 외국 배우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으면서, 동시에 한글 자막을 보며 아주 편하게 감상하지 않는가? 이게 다 한글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그림 같은 글자체이기 때문이다.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에 관한 것을 다 적을 수 있고, 간단하지만 전환이 무궁한 글자! 이것이 훈민정음이다. 세종실록에 그렇게 나와 있다. 미국인들이 이 원리를 알았더라면, 아마 알파벳을 버리고 우리 한글을 가져다 썼을지도 모른다. 알파벳도 소리 문자이기는 하나, 한글과는 확연히 다르다. 발음과 표기가 일치하지 않고 세로쓰기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닭울음 소리까지도 정확히 적을 수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15세기 훈민정음을 직접 보기 위해 영인본을 샀다. 다행히 한글서예연구회에서 엮어낸 교본이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언해본,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등이 그것이다. 복사본이라서 15세기 종이 향은 나지 않지만, 세종대왕을 뵌 듯 기쁘다. 그중 훈민정음 해례본은 복간본까지 사서 가슴에 품고 있다.

말로만 듣던 용비어천가! 한글이 나오는 최초의 서사시다. 살펴보니 10권 125장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券第一(권제일)'라고 밝히고는, 내용 끝에'右第一章(우제일장)'이라고 쓰여 있다. 처음에 의아했는데 금방 깨달았다. 글의 체계가 그랬다. 한글을 먼저 쓰고, 뒤에 뜻을 한문으로 적어놓았다. 한글이 나오기는 하나 한문 위주의 작품이다.

용비어천가가 운문이라면, 석보상절은 한글로 된 최초의 산문이다. 석보상절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펼쳐 놓은 빼어난 문학 작품이다. 수양대군이 아버지 세종의 명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석보상절은 용비어천가보다 한글이 훨씬 많다. 한자가 있긴 하나 그 밑에 한글로 발음을 달아놓고, 대부분 한글로 썼다. 또 세주라 하여, 한자를 썼을 때는 반드시 한글로 풀이까지 해 놓았다.

월인천강지곡! 이를 보고 더 놀랐다. 이건 역작이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었다고 하는 583수의 찬불가인데 제목부터 한글이다. 그것도 한글을 크게 쓰고는 그 밑에 한자는 자그맣게 적었다. 상편이 다 그렇다. 15세기 훈민정음이 하나하나 별처럼 촘촘히 빛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월인석보! 세조 5년(1459)에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해서 펴낸 책이다. 두 권의 책을 합치기는 했는데 더 정교하고 한글이 풍부하다. 훈민정음을 공부하면서 많이 놀랐는데 여기서 또 놀랐다. 월인석보 권1의 종이 장수가 108장(張)이다. 완전 의도적이다. 왜 그랬을까? 아, 신미대사의 숨결이 들어 있었다. 대사가 자문을 맡았다.

나는 훈민정음에서 영화 '기생충'을 본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그때도 그랬다. 부유한 사대부는 한자를 고집했고, 그렇지 못한 아낙네와 백성들이 언문을 읽혔다. 그렇게 하여 우리 한글은 지켜졌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프로필
▶2006년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청주문인협회 회원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수필집 '삶을 일깨우는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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