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뜨락에 봄꽃이 핀다. 연꽃 봉오리 같은 벙근 꽃망울이 부풀어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피어난다. 어느 결에 수십 수백 꽃송이가 부챗살 퍼지듯 쪽빛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다가서서 찬찬히 들여다보니 다섯 장 꽃잎이 마치 별 모양이다.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연분홍 별꽃들이 봄볕에 환하게 빛난다. 유년기의 그리움과 추억을 품은 참꽃, 진달래꽃이다.

진달래는 고향의 꽃이다. 향수가 깃든 꽃이기에 더욱 애정이 간다. 진달래꽃은 고향산천과 부모님과 그리운 친구들을 불러낸다. 그래선지 이 꽃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짠하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던 시절 진달래는 우리 곁에서 피고 지며 삶을 노래한 친근한 봄꽃이었지 싶다. 그러기에 더욱 애착을 느끼며 곁에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봄에 피는 꽃 중에 진달래꽃처럼 숱한 사연과 추억을 담은 꽃도 없으리라.

고향은 늘 흑백 사진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진달래꽃만은 유독 은은하게 선명한 색깔로 남아있다.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슴 속 깊이 남아서일까. 진달래꽃이 필 때면, 사라져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샘물처럼 솟는다. 해마다 이즈음 내 마음은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었을 고향 마을로 달려간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삼태기처럼 생긴 마을 앞뒤 산엔 연분홍 진달래꽃이 봄바람에 휘날리고 있으리라.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지 싶다. 연둣빛 새순이 삐죽거릴 때쯤 산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어른들은 핏빛처럼 물든 진달래꽃이 고통에 겨운 문둥이가 몸부림치며 토한 객혈이라고 했다. 그 시절 등하굣길이 왜 그리 멀고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두어 개 얕은 산고개를 넘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황톳길을 돌고 돌아오는 길목엔 어른 키보다 훨씬 큰 호밀밭이 듬성듬성 자리잡았다. 어린 우리들에게 호밀밭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곳에 문둥이가 웅크리고 앉아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굣길엔 그 호밀밭을 피해 산등성이를 타고 돌아갔다. 배고픈 김에 한 웅큼 따먹은 진달래꽃으로 입술은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진달래꽃을 따먹던 그 순간에도 문둥이를 떠올렸다. 진달래 군락지에서 문둥이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두려움에 온몸이 부르르 떨며 자꾸만 벗겨지는 검정 고무신을 양손에 움켜지고 냅다 줄달음을 쳤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에 빗겨 맨 무명 책보 속 필통이 달그락달그락 장단을 맞췄다. 한참을 달리다 이마의 땀방울을 훔쳐내며 뒤돌아보면, 여자아이들도 놀라 치마끈을 움켜쥐고 헉헉거리며 뒤따랐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놀리다 보면, 어느새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평온함이 찾아왔다. 다시금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립고 그리운 시절이다.

진달래꽃을 보면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세파에 찌들 때도, 삶에 지친 영혼이 흔들릴 때도 그리움은 내 안에 살아 생물처럼 꿈틀거린다. 사랑의 아픔으로 가슴이 멍들었을 때도 진달래꽃처럼 가슴이 저린 그리움은 없다. 진달래는 동심이고 유년의 봄날이기 때문이다. 아니 나의 삶의 기운이자 간직할 추억이기 때문이다.

조간신문을 펼치니 '봄이 오면 꽃이 핀다. 모든 기회에는 어려움이 있고, 모든 어려움에는 기회가 있다.'라는 글귀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온통 먹구름처럼 암울하다. 칩거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을 관조하는 시간도 늘어난다. 한 송이 진달래꽃이 아스라이 사라져간 추억을 불러내 마음의 위안을 준다. 이 힘든 시기에 봄꽃은 자신을 벼리며 우울한 마음을 치유하는 유일한 선물이리라.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인간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듯하지만, 긴 겨울을 이겨내야 봄꽃을 피우듯 이 신산한 고통을 버텨내야 봄날 같은 세상이 오리라 믿는다.

봄을 시샘하듯 바람이 세차다. 하늘거리는 진달래꽃잎이 속절없이 흐르는 봄날처럼 흩날린다. 꽃잎 사이로 아련한 추억도 함께 스러진다. 마른 대지 위에 점점이 수놓은 진분홍 꽃잎이 고통에 시달리는 세인들의 피눈물처럼 검붉다. 유년시절 두려움이 일던 꽃의 진실을 알아버린 탓이다. 봄꽃을 바라보며 안복을 누리는 호사도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가슴이 허허로워 봄길이라도 자박자박 걷고 싶다. 이 봄이 더 가기 전에 진달래꽃으로 산허리를 물들인 산길을 걸으며 옛 그리움이라도 삼켜야겠다.

강전섭 이사
강전섭 원장

약력
▶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 우암수필문학회,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청주문인협회 회원
▶ 충북수필문학회 부회장
▶ 한국문학세계화추진위원회 충청지부장
▶ 청주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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