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올 4월 19일은 4·19혁명 제60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19~26일까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3·15부정선거에 항거해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붕괴시킨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이 인권을 탄압하고 3·15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 하자 대구, 광주, 대전, 마산 등 대도시의 청년 학생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무장한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학생들이 목숨을 잃고 중상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결국 4·19혁명이 터졌다.

당시 전국의 초·중·고·대학생, 일반 시민, 교수 등 10여 만 명이 참여해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제2공화국을 탄생시켰으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 실제로 진압에 동원된 무장 경찰들과 깡패들이 최루탄을 쏘고 곤봉을 휘두르거나 총을 발사하여 186명이 사망했고, 1천500여 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시위가 난무하는 바람에 사회질서가 혼란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이 파손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청년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은 한국 역사에서 일반 대중이 봉기하여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최초의 사건으로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이후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 4·19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한다. 한 역사학자는 절대왕정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에 비유하였고, 어느 경제학자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야당인 민주당이정권을 잡았다. 반공보수가 당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학생들과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당은 장면 총리가 주도하는 신파와 윤보선 대통령이 주도하는 구파의 대립으로 여전히 정치사회적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 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를 5·16 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의거라고 폄하했다고 한다.

그래도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 민주, 정의 등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국립 4·19 민주묘지, 기념탑, 기념관을 조성하고, 인근의 경전철 역명을 4·19민주묘지역으로 정했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기념식 프로그램 가운데 기념공연은 4·19혁명에 참여한 다양한 계층의 이야기를 극과 노래, 다양한 퍼포먼스로 표현하여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과 값진 희생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주어 인기가 많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그런데 제60회를 맞는 올해 4·19혁명 기념식은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아쉽고 안타깝다. 게다가 학교 현장 수업이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다보니 4·19혁명 관련 교과수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울 것 같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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