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2020년 경자년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본 군인들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지 88주년이 되는 해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오전 일제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과 상해 점령 전승기념 축하행사를 진행하는 도중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해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는 사망하고,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으며,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가 잘리었고, 제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극찬했고, 이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윤봉길 의사는 거사 직후 체포 연행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11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12월 18일 제9사단 사령부 위수구금소에 도착했다. 이어 다음날인 1932년 12월 19일 이시카와현 금택형무소 교외 미쓰코치 공병작업장 내 산골짜기에서 잔혹하게 총살되어 25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일제는 윤 의사의 무릎을 강제로 꿇려 굴욕적인 낮은 자세로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리고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그러자 윤 의사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이는 바람에 마치 일장기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우리 한민족이면 누구나 치욕적인 그날을 결코 잊지 말고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다가올 국난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의 파평 윤씨 문중에서 태어나 10세 되던 해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그 후 동생 윤성의와 함께 한학을 공부했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의 매곡 성주록 선생 문하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1923년 오치서숙 시 대회에서 장원을 했고, 1928년 시집을 발간했다.

1926년 오치서숙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농민 운동에 관심을 갖고 오치서숙 동창들과 야학을 개설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등을 가르치면서 수업의 교재로 '농민독본'을 저술했다. 1929년 부흥원을 설립해 인기리에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기도 했다.

윤 의사는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됐지만 월진회를 조직, 이를 기반으로 농촌 자활운동을 펼쳐나갔다. 감시가 심해지자 1930년 3월 6일 새벽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비장한 출향가를 써놓고 삽교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백범 김구 선생의 지도하에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하여 윤봉길 의사는 문무를 겸비한 애국지사로 항일독립운동가, 낭만적인 시인, 농촌개혁가, 농민계몽가로 불리고 있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그런데 현행 국사교과서에는 홍구공원 폭탄투척만 간단하게 기록해 놓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윤 의사를 단지 테러리스트로만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이 윤봉길 의사의 진면목을 인식할 수 있도록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가 국사 교과서의 관련 기록을 수정·보완하는 데 사업의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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