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코로나19로 개학이 늦어지면서 바뀐 생활습관 중 하나는 시계를 보지 않는 일이다. 눈을 뜨면서부터 시계는 가장 가까이서 내 하루를 지켜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요일마다 가야 할 학교와 수업 시간이 다른 불규칙한 시간을 안전하게 안내해주었고 깜박 놓치는 실수의 결점도 막아주었다. 시계를 보며 쫓기듯 긴장하면서도 시계가 있어 든든했다.

시계와 멀어지는 것은 일상의 끈을 끊는 것과 같다. 보이지 않게 옥죄던 시간에서 탈출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이젠 주어진 시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내 마음대로 시간을 끌고 가도 되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고립된 생활은 시간의 구속에서 자유를 얻었다. 불편하지 않은 쾌감이었다.

그 사이 벚꽃이 피고 지고 제비꽃 진자리에 토끼풀꽃이 하얗다. 산빛도 밝아지면서 무심천 물빛도 깊어졌다. 우리 집에서 보이는 무심천은 송천교 아래로 흐르는 물이다. 오랫동안 모랫바닥만 드러내어 백사장 같던 곳에 물결이 일렁인다. 보洑 안쪽에서 모였다가 쏟아지는 물줄기는 농사를 준비하는 마른 논으로 흐를 것이다. 자연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코로나19도 생활 속 거리 두기로 바뀌었다. 돌아보니 시간을 놓아버린 나만, 은폐되어 내 안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는 본래의 일을 마친 후 새로운 내 모습으로 소통하고 싶은 신조어로 취미나 특기 활동을 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원래는 연극배우가 쓰는 탈이나 가면을 뜻하는데 내 안의 나, 새로운 내 정체성을 찾아 소통하고 싶은 현대인들의 다양성 욕구로 멀티 페르소나는 관심과 인기가 높다고 한다.

나도 때로는 많은 가면을 쓰고 산다. 평범한 오전과 방과 후 강사인 오후로 나누어진 가면은 완전히 다르다. 아내와 엄마로도 다른 가면이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가면은 조금씩 다르다. 그 안에 시계는 변화하지 않는 소통의 고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놓아버린 시간을 다시 찾기로 했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는 즐겨보는 프로그램이다. 익숙한 동네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풍경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많은 것이 보이고 새롭다. 토박이 노인의 삶에서는 지난 시간의 냄새가 묻어나고 소박한 밥상은 정성이 담긴 손맛이 있다. 전통을 잇는 젊은이의 검은 손끝을, 낮은 담장에서 들리는 화목한 웃음을, 정겹게 잡을 수 있는 사람과의 손 접촉은 느리게 걷는 골목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다.

오랫동안 살아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익숙한 동네로 갔다. 정미소는 도로변에 있다. 도보도 있지만 지금은 그 길로 걷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이 걷지 않으면서 길은 망가졌고 정미소도 기능을 잃고 공간만 남았다. 벽은 허물어져 불안하고 바람에 날아온 비닐봉지만 마른 나뭇가지에 매달려 펄럭인다. 한때 드넓은 질구지 들녘에서 수확한 벼를 탈곡하며 충만감을 주었을 정미소는 생활이 변한 도시 속에서 추억의 간판만 갖고 있다. 방아 찧을 때 풍기던 구수하고 달콤한 쌀 냄새가 그립다.

초등학교 근처 벽돌공장 모래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높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쏟아진 모래에서 학교 가는 것도 잊고 놀았다. 모래로 쓰러지고 미끄럼타면서 길거리로 흩어져도 주인은 묵묵히 지켜봤다. 모래 촉감처럼 부드럽던 주인의 마음에 아이들은 추억이 쌓였지만 벽돌공장은 많이 작아졌다. 가림막으로 좁아진 길도 차도에 밀려 낭만이 사라졌다.

느리게 걸으며 여유를 가져보려 했던 마음과는 달리 걸을수록 불안했다. 위험하여 피하고 상대를 의식하며 거리 두면서 걸음도 빨라졌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나부터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느린 것에 화나는 설문조사 중 인상적인 것이 있다. 가장 화나게 하는 상대방 운전습관은 무엇인가 물었더니'느리게 운전하는 차'였다. 영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인데 느리게 운전하는 습관이 가장 화나게 한다니, 느린 것을 이해하는 정도는 없는가 보다.

정서적으로 보면 느린 것은 추억의 기다림이 있다. 며칠 전 불국사에 갔더니 우체통이 보였다. 느린 우체통이라 했다.'삶의 속도를 줄이고 돌아볼 기회를 경험'해보라는 우체통 주변에 사람들이 붐볐다.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나도 오늘의 추억을 전하는 느린 우체통에 나에게 편지를 써서 넣었다. 엽서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편지 쓸 때 느꼈던 불국사 오월의 빛을 회상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다. 느려도 좋은 이유다.

기다리던 학교 개학 날짜가 발표 났다. 순차적 등교라서 전 학년을 수업해야 하는 방과 후 학교 수업은 조금 더 늦어질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은 온다. 시계가 다시 필요해졌다. 느슨해진 마음을 세우고 준비하는 지금부터가 나는 수업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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