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반짝이는 것은 다 금이 아니다'라는 격언이 있지만 햇볕이 쏟아져 들어올 때 그것은 금보다 더 짜릿하고 심쿵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진짜 금도 아닌 것이 저 속에 무엇이 있어 저리도 반짝이는가.

한 알의 대추가 익으려면 그 속에 태풍, 천둥, 벼락 몇 개가 있어야 한다고 시인은 노래했다. 아마도 저 속에는 1세기 가까운 인생살이 견딘 인고의 세월이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이리라. 안방 문을 열고 다시 거실 벽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아이들이 무겁게 들고 온 것을 알아맞혀 보라고 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포장을 풀고 나서야 우리 부부의 훈장 증과 훈장 두 개를 나란히 넣어 표구한 것임을 알았다.

두 사람의 부이사관 직급이 새겨진 훈장 증 사이에 붉은 리본의 홍조근정훈장 그 자체도 값진데 표구를 잘해서 더 빛이 나고 은은한 광채에 품격이 느껴진다. 격조 높은 값진 예술품으로 승화한 것 같다.

아직 철없다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싶어 가슴속을 역류한 눈물 한 방울이 채신머리없이 툭 떨어진다.

퇴직을 앞두고 한 며칠 걸릴 거라는 남편의 뇌동맥류 수술이 의료사고가 발생하여 39일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퇴원을 했다. 생사를 넘나들며 10킬로 그램 이상이 빠진 허깨비 같은 모습으로 간신히 걸어서 퇴원을 했으니 연말 훈포장 전수식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 훈포장 전수식 못 가는 것이 뭐 대수랴 싶었다.

후에 집으로 보내온 훈장을 그냥 서랍에 넣고 부상인 시계는 친구와 지인에게 주었다. 그것을 내 생일에 와서 가져 갖다는데 신경을 안 썼으니 없어진 것 자체를 몰랐다. 자기 자랑으로 볼 수도 있으니 쑥스러워 걸지 않을 것을 안 자식들이 표구를 해서 사위가 시침 뚝 떼고 걸어 놓고 간 것이다.

부부가 지방공무원으로서 최고의 위치에서 퇴임하는 게 처음이라는 덕담이 좋은 일에 마가 낀다 라는 속담과 승자의 저주라는 말을 불러왔나 보다. 이렇게 아귀가 맞지 않아 잊힌 순간들을 자식들은 그래도 기억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 목이 멘다.

부부공무원으로 합산 80여 년을 근무했으니 각종 상장과 표창장, 모범공무원증, 감사장에 송공패, 기념패, 공로패, 등단증 까지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자기 좀 봐 달라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진열을 하니 꼭 기념패 가게 같다. 열심히 산다고 괜스레 쓸데없는 부산물만 양산한 것은 아닌가 싶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희소성을 잃었으니 귀한 줄 모르지만, 그 시절 이들이 우리에게 처음 올 때는 가슴 뛰는 기쁨이었을 텐데 세월은 그런 것 마저 퇴색시켰다.

부모들은 자식 하는 짓이 흡족하지 않을 때 어려서 이미 예쁜 짓을 많이 했으니 충분하다고 손사례를 친다. 그렇게 생각하면 훈장이 아닌 많은 실적의 이런 것들은 자식이 어려서 재롱떨며 효도하던 때의 표상이라고 할지.

흔히들 퇴직을 하면 제철 히트상품일 때 90퍼센트를 디스카운트하여 파는 이월 상품이 된다고 한다. 나중에는 그냥 가져가라고 해도 가져가지 않는 게 우리 인생이라나. 퇴직 전 많이 들어서 스스로 철 지난 이월 상품이라고 일찌감치 주입을 시켰다. 지난날을 잊고 사회 일원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즐겁게 하고 봉사도 하자고 세뇌를 하였다.

그 시절 여직원이라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노파심과 열정으로 밤 12시까지 야근을 하고 새벽 4시에 숙직실 문울 두드려 특근을 오래 하니 목감기가 걸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체 인력을 쓰지 않아 출산을 하고 보름 만에 눈물을 쏟으며 출근을 한 일은 지금도 아이들을 안쓰럽게 보게 된다. 그로 인해 지금 편히 사는 것 같아 가능한 한 노코멘트를 한다. 그들한테 그 정성을 들였어야 하는 건데.

눈보라 휘날리고 폭풍우 몰아치던 날, 천둥 치고 벼락이 치던 날들을 용하게 이겨내서 꽃피고 나비가 나는 평화로운 날들로 연출했구나.

이제 금빛 흔적을 남기고 박제되어 '아, 옛날이여'가 되었지만 '우리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잊었던 자존감과 자긍심이 되살아나 에너자이저가 된다. 다시 반짝이는 훈장증과 훈장을 바라본다. 햇볕에 반사되는 금빛 여섯 줄이 나에게 투사되어 표구에 담긴 세월과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영희 수필가

#약력

▶1998 '한맥문학'신인상,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18 청주시 생명글자판 당선, 26회 동양일보 소설부문 당선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풍문학회 회장 역임
▶수필집 '칡꽃 향기', '정비공'
▶충청북도교육청 방과후학교지원단장 역임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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