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위해 20대 인생 헌신…후회없고 자부심 느껴"

조동삼 충북대 명예교수가 6·25전쟁 당시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신동빈
조동삼 충북대 명예교수가 6·25전쟁 당시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신동빈

[중부매일 신동빈 기자] "손들어!, 움직이지마!" 1952년 겨울, 강원도 인제의 한 마을에서 후방정찰임무를 맡던 한 청년은 북한군 3명을 생포하게 된다. 대학을 다니며 부푼 꿈을 품었던 그는 6·25전쟁이라는 격랑에 휩쓸리며, 어느덧 늠름한 군인으로 거듭나 있었다.

조동삼(93) 충북대학교 명예교수는 1949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합격, 학업에 정진하던 중 전쟁발발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학생신분이라 군 징병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운명처럼 우연이 겹치며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4후퇴가 시작되면서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어요. 천안까지 내려갔는데, 아버지가 맹장염에 걸리면서 건강이 나빠졌죠. 그래서 제가 산을 타고 약을 구하러 다녔는데 그때 우리군 정보원들을 만났어요. 반가움도 잠시, 간첩으로 오해받으며 곤혹을 치렀죠."

조 옹은 정보원들 앞에서 서울대 교가를 부르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오해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몇 번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속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울려 퍼진 총성 한 발. 조 옹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사지는 멀쩡했다. 정보원들은 조 옹을 조준한 것이 아닌, 공포사격만 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니 자칫 가족들까지도 위험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족과 헤어지고 대전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국민병에 편입돼 본격적인 군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조 옹은 부대에서 서울대생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행정업무를 도맡았다. CTC민간수송대 보급품 수송업무와 국민병 귀향증 작성 역할을 하며 수개월을 보낸 그는 1952년 미군 31연대로 편입, 내셔널폴리스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내셔널폴리스는 미군 1명, 한국군 2명이 한 조가 돼 후방정찰, 민간인 후송 등을 합니다. 38선 최전방에서 전투하는 우리군을 돕고,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는 북한군을 색출하는 게 주요 임무죠."

실제 조 옹은 정찰임무를 하던 중 북한군 3명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미 민간인이 피난 간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른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주변을 정찰하는 과정에서 패잔병들을 붙잡은 것이다.

"북한군을 보고 칼빈총을 장전하는데, 이게 꽁꽁 얼어서 장전이 안됐어요. 돌부리에 대고 발로 차고 해서 간신히 총알을 넣고 접근했죠. 부엌서 밥을 짓던 이들은 다행히 순순히 투항했습니다."

지뢰밭을 지나고, 절벽을 오르며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그는 전쟁휴전과 함께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평화로운 학교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군에서 다시 소집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소위로 임관한 그는 군에서 영농장교로 일하며, 황폐화된 국토를 경작지로 바꾸는데 온힘을 쏟는다.

"전쟁으로 오염된 땅을 회복시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어요. 정성에 정성을 쏟아야 새싹이 겨우 얼굴을 내밀었죠. 그래도 거기서 터득한 노하우가 이후 농과대학 교수로서 학문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렇게 5년여의 세월을 보낸 조 옹은 1957년께 제대를 하며 6·25전쟁부터 이어졌던 군 생활의 마침표를 찍는다. 20대 인생을 통째로 군에 헌신했지만 그에게 후회는 없었다.

"그 시절은 이 땅에 모든 젊은이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살았어요. 군대를 안 갈수도 있지 않았냐고 묻지만, 그게 제 운명이었고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하면 자부심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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