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산대성'으로 몽골 침입 막았다

[중부매일 이병인 기자] 계룡산성에 대한 고려~조선시대 활용에 대한 역사기록이 분명하지 않지만, 산성의 입지 및 성벽의 축조방식, 망대지 및 용도(甬道) 등이 대몽항쟁기 험산대성의 입보용성곽의 특징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계룡산성은 초축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청자와 어골복합문 기와류, 특히 '鷄龍山(防護)別監金'銘 명문기와는 대몽항쟁기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내성 남벽의 협축성벽과 조선후기 백자류와 기와류는 기록에 없지만, 계룡산성이 조선후기에 경영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계룡산성은 대몽항쟁기 입보용산성 중에서도 險山大城의 전형적인 사례이며, 충청남도 내에서는 가장 높고 험준한 곳에 축조된 대형산성이라 할 수 있다.

충청남도에 위치한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의 복합식(複合式) 산성 구조를 보이는 성곽 중에서 중세성곽의 특징을 담고 있다.

한편으로 현재 계룡산성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정비 및 보수가 진행되지 않은 성곽에 해당되기에 내성 성벽의 축조방식과 규모면에서 외성과 다르기 때문에 향후 발굴조사를 통해 성곽의 경영과 관련하여 내성과 외성 축조의 순서를 밝힐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계룡산성에서 확인된 2개소의 용도(甬道)는 대몽항쟁기 이후의 입보용 성곽에서 확인되는 사례 뿐 만 아니라 남동쪽 회절부의 용도는 길이 약 400m 정도로 현재까지 확인된 대몽항쟁기 5차 전쟁기 이후 축조된 입보용산성 중에서 가장 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간에 방형의 석축시설이 존재하는데, 그 기능에 대해서는 향후 발굴조사가 진행된다면 대몽항쟁기 축조 및 활용 사례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후의 축성 및 활용 사례를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계룡산성에서 수습된 '鷄龍山(防護)別監金'銘 명문기와는 대몽항쟁기에 파견된 방호별감의 실체를 밝혀준 최초의 고고학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향후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명문기와 편이 많이 확보되어 명문에 대한 판독이 면밀하게 진행된다면, 계룡산성에 파견된 방호별감의 이름을 확인할 수도 있다.

더불어 기와를 제작한 '儒城'지역과 3행에서 확인되는 '東面'은 고려시대 지방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근 공주 및 충청남도 일대의 중세성곽으로서 축성사적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향후 발굴조사 등이 진행된다면 그 결과를 바탕으로 고려 대몽항쟁기 · 합단적 및 왜구의 침입에 대한 전황,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부족한 전쟁사를 보완해 줄 수 있는 고고학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계룡산성은 역사적으로 고려 대몽항쟁기, 합단적 및 왜구의 침입에 대한 전황,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부족한 전쟁사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산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몽항쟁기 입보용산성 중에서도 險山大城의 전형적인 사례이며, 충청남도 내에서는 가장 높고 험준한 곳에 축조된 대형산성이라 할 수 있다.

향후 공주 계룡산성은 조사가 진행된다면 외성에서 내성으로의 변화시기, 성벽에 연결된 용도 및 망대지의 구조 및 기능, '鷄龍山(防護)別監金'銘 명문기와가 수습된 추정 장대지 등 중세 산성의 특징적인 형태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고려~조선시대 관방사를 복원해 줄 중요한 성곽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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