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얼마 전까지 난 최양업 신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다. 배론 성지에 대해 글을 쓸 일이 생겨 관심이 생겨났다. 공부하다보니 너무도 훌륭한 분임을 알게되었다.

1836년에 세 명의 소년이 마카오로 떠난다.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백성들이 핍진해가는 상황에 이색적인 일이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명으로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조선에 파견한 모방 신부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마카오엔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가 있었다.

지금의 카톨릭은 당시 조선에선 서학이었다. 핍진하고 갈 곳 없는 조선 백성들 중에 서학이 지닌 평등, 박애에서 감동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가치 내지 성리학적인 내용들과 대치되는 것들이 있어 갈등도 컸음에도 서학으로 점점 기울어졌다.

조선은 임란, 병란의 재앙을 거쳤음에도 성리학이 도리어 경직되어 갔다. 이에 반발해 새로운 물꼬를 터나간 실학은 실사구시, 이용후생 측면에선 강했으나 인간 본연의 문제인 자유와 평등에 아주 깊진 않았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의 동학이 태동되기 이전이다. 그런 시대의 어둠 속에 서학은 서서히 번져나갔다. 숱한 박해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고 변용을 거듭해 현재에 이르렀다.

천주교에서 특히 존경 받는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에 의해 가려진 바가 크다.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기리는 것에 대해 난 이의가 없다. 최초니 일등주의 사고가 팽배한 우리 사회의 폐단을 짚고 싶을뿐이다. 최양업 신부 이야기는 그에 대한 무수한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마카오에 간 세 소년 중에 최방제는 그곳에서 위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은 사제 서품을 받고 1845년에 귀국한 이듬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병오박해라고 해서 그와 연관된 사람들이 함께 처형된다.

15살에 고향을 떠난 최양업은 떠난지 3년 후엔 역시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해박해의 순교자로 잃는다. 친구이자 신앙 동지인 김대건마저 잃은 그는 타국에서 슬픔과 경악을 금치 못한다. 셋 중 유일하게 남은 그는 그럼에도 귀국을 서두른다. 조국은 언제 자기를 해칠지 모르는 위험한 땅이지만 그에겐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서 귀국해 사제 서품을 받은 몸으로서 사목을 하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귀국하려는 그의 꿈은 좌절에 좌절을 거듭하다가 1849년에야 이루어진다. 입국하자마자 잠시의 휴식도 없이 전라도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 다섯 개 도의 순방에 나선다. 12년 후인 1861년에 41세의 나이로 과로와 장티푸스로 사망하기까지 잠을 채 못 이루고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교우촌 등을 돌며 사목한다. 그가 12년간 다닌 거리가 무려 9만리나 된다고 한다.

난 천주교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아니다. 개신교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천주교의 이승훈, 김대건을 이름 정도 알아왔다. 최양업 신부에 대해 전혀 모르던 내게 그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을 넘어 아이러니와 슬픔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훌륭함에도 최초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지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최초, 일등만 기억한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그렇게 교육되고 학습되어 그런 카테고리에 익숙하다. 그래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과연 행복한가. 정신의 균형이 잡히지 않고 상식의 빈곤에 처해 있지 않은가. 어떤 가치 평가를 해야할 때 제대로 되는가.

우리는 일등주의라는 강박증에 걸린 사회의 피해자이며 생산, 재생산자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그 어떤 가치에도 고루 안배하는 균형 잡힌 품성을 지녔던 우리가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일등주의는 당장이라도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신자유주의가 뿜는 냉기로 인해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저질 폐단 중의 하나인 그것 역시 새 옷으로 갈아 입기 위해 버려야 할 옷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