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무 조흥동의 한량무. / 국립국악원 제공
명무 조흥동의 한량무. / 국립국악원 제공

문(文)을 견주는 무(武)

한량(閑良)은 고려시대 처음 등장한 신분이며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신분과 계층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됐다. 조선이 개국된 이후 한량은 전·현직 품관(品官) 자제로서 일정한 직이 없는 계층으로 인식됐고, 이후 일정한 계층을 특정하기 보다는 '문무대소신료(文武大小臣僚)·한량(閑良)·기로(耆老)'로 표현되듯이 대중의 민의를 대표하는 계층이라는 수사적 표현으로 사용됐다. 양인가운데 일정한 역이 부과되지 않았고 호적에도 올리지 않은 무과거자(武科擧子)를 통상적으로 '한량'이라 불렀다.

1699년(숙종22년) 형조판서 최석영은 과거 응시자의 적서를 분별하기 위해 왕에게 건의해 유학(幼學)과 한량을 양반문무(兩班文武)의 호칭으로 삼고 업유(業儒)와 업무(業武)는 서얼문무(庶孼文武)의 호칭으로 공식화됐다. 조선 후기 유학자 조재삼(趙在三)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백과사전같은 종류의 '송남잡지(宋南雜誌)'를 저술했다, 그는 "한량은 지금 양가(良家)의 자제 '한정(閑丁)'으로 무사의 호칭이 됐으니, 문사를 '예기'의 '유학(幼學)'에서 취하여 부르는 것과 같다. 또 지금은 아무 하는 일 없는 자를 '무한량(武閑良)'이라 한다"고 했다. 이를 보면, 한량은 일정한 역이 부과되지 않은 무사(한정)로 무(武)를 업으로 삼는 사람을 의미하고, 문을 대표하는 유학(유생)에 견주는 무(武)를 대표하는 자로 인식됐다.

조선후기 전령문서
조선후기 전령문서

군사적 능력을 갖춘 무사

국가의 통치이념상 문과 무의 반열을 맞추어 유학에 대비시켜 한량의 위치를 규정했지만, 한량은 중앙과 지방에서 하급 장교층을 담당하는 군사제도의 핵심 인력충원 대상자가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한량이 일정한 직책과 임무를 맡는 자들로 서술되어 있고, 직부전시(直赴殿試, 초시와 복시를 거치지 않고 응시자격부여)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18세기 관성장(管城將, 산성과과 군수직을 겸한 책임자)이 한량 아무개에게 보낸 전령문서(사진)처럼 조선후기 현존하는 다양한 전령문서는 전령의 성명과 일자는 공란으로 두어 나중에 기입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당시 지방과 중앙의 주요 군사거점인 영(營)과 진(鎭)에서 만들어진 문서를 통해 해당 영진에서는 필요한 인적자원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문서를 준비하여 관인을 미리 찍어둔 임명장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대상자로서는 일정한 역이 없어 차출가능하고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 한량이 그 대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령문서는 19세기말까지 등장했다.

풍류를 아는 무사

조선후기의 문학에서는 한량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그린 것이 많았다. 지금도 통상적으로 일하지 않고 노는 젊은이들에게 빗대어 이야기하는 '한량 같은 놈'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한량'을 비하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후기에는 무과시험에 합격했지만 직(職)이 없던 한량들이 많았다. 특히 19세기말에는 한량을 일정한 직사가 없이 놀고 먹던 말단 양반계층으로 불리거나 지금처럼 돈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비유하는 표현이 되기로 했다. 특히 문관중심의 사회에서 무관들이 매일 활을 쏘고 무예를 연마하는 모습이 달갑지 않은 행동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당시 문인들에게는 무인들이 놀고 먹는 사람으로 보여졌을 것이고, 실제 많은 무인들이 한양의 유흥계를 누빈 사실도 있다는 점에서 비판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조선말기 과거 무과시험에서 화살 한 두발만 맞추면 합격하는 등 엉터리 실력들이 급제할 정도였으니 한량의 의미가 퇴색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허건식 체육학 박사, WMC기획경영부 부장
허건식 체육학 박사, WMC기획경영부 부장

하지만, 조선후기 한량이 단순히 놀고먹는 말단 양반들이었을까? 한량은 시(詩), 서(書), 음악, 무예 등에 능하고 풍류(風流)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할 뿐 아니라 평소 유학이나 무예를 배워 관리나 고급 군인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기득권이었던 문인들에 비해 자신감이 있었고 여유로운 삶이었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무관으로서 임명되어 활약한 무(武)를 대표하는 특수신분층이었다. 활쏘기가 뛰어난 사람을 한량 또는 활량(弓良)으로 불린 것도 조선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