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일칼럼] 최동일 논설실장

#1. 얼마전 친구에게서 하소연이나 다름없는 넋두리를 들었다. 며칠 뒤 자식처럼 키운 조카 아이를 결혼시키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청첩을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생각지도 못한 덤터기를 쓰게 됐다는 얘기다. 사연인 즉 올 봄 예약했다가 가을로 미뤄 어쩔수 없이 예식장을 이용하게 됐는데 하객용 부페음식 계약 때문에 불필요한 비용을 지출하게 돼 속이 쓰리다는 것이다. 양가 가족 등 식장에 오는 인원은 50명이 안되는데 식장 이용에 따른 음식 마춤이 최소 100인분이라서 50명분을 떠안게 된 것이다.

#2. 지인이 며칠전 모친상을 당했다. 올 봄이후 상(喪)을 당한 다른 집들 처럼 이곳도 주변에 알리기는 했지만 찾아오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조문객들도 예전과 다르게 문상(問喪)을 하자마자 일어나기 바빴는데도 상주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등 장례식장 풍경이 확연히 달라졌다. 상주를 비롯한 유기족들보다 조의금 계좌입금 메시지를 알리는 그들의 휴대폰이 더 바빠 보였다. 장례식장내 상가가 몇곳 됐지만 조용하기만 했다. 최근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한두달 전에 비해 더 썰렁해진 듯 했다.

코로나 19가 만든 '포스트 코로나' 시대,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다. 재택근무·화상회의로 대변되는 직장문화도 그렇고, 원격수업과 온라인 등교가 진행되는 학교도 그렇다. 산업별 부침(浮沈)은 경제계 판도를 다시 그리고 있고,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구조적인 문제가 됐다. 이런 가운데 전통이란 옹벽에 싸여 사회적 변화의 흐름에서 한발 벗어나 있던 결혼과 장사(葬事) 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벌써부터 조금씩 바뀌고는 있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제는 변화를 부인할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우리의 사회관계는 대면(對面)이 중심이었다. 얼굴 한번 보는 게 인사였고, 전화 등 비대면은 약식일 뿐이었다. 심지어 '눈도장'이란 말이 일상적으로 쓰였을 정도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뉴노멀' 즉, '달라진·새로운 일상'은 이같은 오래된 틀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팬데믹의 영향이지만 그 밑바탕에 다른 문제가 있었기에 이리 된 것이다. 바로 허례허식, 과도한 겉치레와 보여주기식 행사, 본질을 왜곡하는 형식의 과잉(過剩)이 그것이다. 바꿔야 하고 바꾸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던 그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 몸에 배어있던 것들이 새롭게 바뀌기까지 어느정도 혼란이 일 수 밖에 없다. 축의금이야 계좌가 대신한다지만 축하의 마음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장례식도 다르지 않다. 이제까지 품앗이나 다름없는 일들이었기에 어느 순간 이를 잘라내기도 어렵다. 발걸음의 범위를 어디까지 할 지도 헷갈린다. 기존의 장소와 시설속에서 달라진 문화가 자리하는 것도 불편하다. 결혼·장사 문화의 앞날을 세세히 예상하긴 어려워도 큰 흐름은 보인다. 결국 단출하지만 의미를 강조하는 형식으로 치러질 것이다.

최동일 논설실장
최동일 논설실장

경조사 문화가 달라지는 것은 형식의 과잉을 벗는 과정이기도 하다. 코로나19가 만든 또다른 사회상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 벗겨내야 할 과잉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더 중요하고 큰 것들이 적지않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 과잉이다. 여기에 이념 과잉까지 더해진 것이 극단의 분열과 편가르기로 점철된 오늘의 민낯이다. 잘못된 것이 아니더라도 과잉은 늘 문제다. 특히 모두와 연결된 정치 과잉은 다른 과잉으로 이어진다. 화려하고 풍성한 예식을 하려다보면 시설도, 알림도, 접객도 다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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