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여행] '건축의 탄생' 저자, 김홍철

자유센터 / 건축의 탄생에서
자유센터 / 건축의 탄생에서

1960년 4월 19일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그리고 1년 뒤 1961년 5월 16일,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는 군사정변을 일으켜 대한민국을 장악했다. 과거에 잠시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박정희는 미국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미국의 인정을 받아야 자신이 대통령 선거를 치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반공이념을 국가전면으로 내세워 결국 미국의 신뢰를 얻은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세계 최빈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을 성장시키기 위해 국가경제개발계획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 때 중앙정보부를 만들면서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환으로 서울에서 가장 서울이 잘 보이는 남산을 전략기지로 택하면서 그곳에 반공이념으로 똘똘 뭉친 정부기관들을 배치하기로 한다.

이 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등장한다. 김수근이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던 1959년에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사당을 짓기 위해 건축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김수근은 동경예대 동기들과 함께 국회의사당 건축 공모에 참가하게 된다. 결과는 1등.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한국에 들어와 김수근 건축사무소를 개설하고, 국회의사당 건축 프로젝트를 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하지만 일이 꼬여버렸다.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의사당 건축계획은 아예 없었던 일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은 일이 언제 터질지 몰랐다. 그야말로 격동의 대한민국이었다. 그 사실에 너무 화가 났던 김수근은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김수근은 삶이 비행기 안에서 바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그림을 그리고 있던 김수근에게 화가냐고 물었다. 김수근은 자신은 화가가 아니라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을 하자, 남자는 김수근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면서 자신을 한 번 찾아오라고 한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었던 것이다.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그는 곧 김종필을 찾아가 서울 아차산에 휴양지 계획을 받아낸다.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워커힐 호텔부지이다. 그 때부터 김수근은 대한민국에서 소위 가장 잘 나가는 건축가가 되었다. 남산 계획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김종필은 국가보조금과 국민성금으로 이루어진 국책사업을 하나 계획하고 있다고 하며 남산에 반공연맹을 위한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어달라고 김수근에게 의뢰한다. 당시 김수근의 나이는 고작 서른 두 살이었고, 김종필의 나이는 서른 여덟 살이었다.

일본에서 현대 건축을 공부하고 있었던 김수근은 우리나라에서도 르 코르뷔지에의 수제자였던 김중업에게 현대건축을 잠시 배웠던 경험으로 노출 콘크리트 건축인 자유센터를 짓기로 한다. 김수근은 르 코르뷔지에의 찬디가르 국회의사당과 단게 겐조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을 모티브로 자유센터를 설계한다. 자유센터는 원래 본관, 국제자유회관 그리고 국제회의장인 총 3개의 시설로 이루어진 복합시설이었다. 하지만 국제회의장은 자금난으로 지어지지 못했다. 현재 자유센터 본관은 결혼식장과 야외자동차극장으로 이용되고 있고, 국제자유회관은 타워호텔로 사용되어지다가, 지금은 호텔 반얀트리 서울로 사용되고 있다.

김홍철 '건축의 탄생' 저자
김홍철 '건축의 탄생' 저자

김수근은 이후에도 꾸준히 세운상가, 여의도 종합개발계획, 올림픽 주경기장 등 국가적인 건축 프로젝트를 맡아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가로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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