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걸어갈 때 아주 적은 공간인 밟는 땅만 있으면 족하다. 다른 땅은 밟지 않기 때문이다. 밟지 않는 땅은 걷는 데 쓸모가 없다는 얘기다. 이른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정말 밟는 땅만 있으면 걷는 데 지장이 없을까? 만약 밟고 갈 땅만 남겨놓고 밟지 않는 땅을 모두 제거한다면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당연히 어렵다. 걸을 때 불필요한 땅인데도 그 땅 때문에 걷기가 어렵다고?

'장자-잡편,외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혜자(惠子)가 장자를 찾아왔다. 혜자는 장자의 친구로 함께 사상을 논했던 전국 시대 송나라 정치, 사상가다. 장자의 사상에 심도 있는 지적과 새로운 지식 제공으로 그 깊이를 더 했다. 혜자는 이날 장자의 '쓸모없음의 쓸모,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논박하기 위해 장자를 찾아왔던 거다.

장자-"쓸모없음을 알아야 쓸모 있음을 알 수 있다네." 혜자-"자네의 말은 아무 쓸모가 없네." 장자-"무릇 천지는 넓고 또 크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발로 밟는 크기만큼의 공간일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발의 크기를 측량해 그 공간만 남기고 주위의 나머지 땅을 깊이 파 황천까지 도달하게 하면, 발 딛는 공간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쓸모 있는 땅이 될 수 있겠는가?"

혜자-"당연히 쓸모가 없지." 장자-"그렇다면 쓸모없는 것이 쓸모가 있다는 것이 또한 분명한 사실이고만." 이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공간은 발로 밟는 크기만큼 아주 협소하지만, 직접 밟지 않는 땅을 믿은 뒤에라야(땅이 뒷받침이 되어야) 넓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얘기다.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장자의 주장은 시각적 기준에 의한 판단에서 비롯된 오류와 한계에 대한 명찰(明察)적 지적이다. 부분적 지식이나 정보만으로는 세상사의 참모습을 깨달을 수 없다는 얘기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의식할 수 있는 것만을 기준 삼아 우리가 사고와 행동을 하지 않음을 보여준 아주 좋은 예다.

걸을 때 '밟는 공간'은 눈으로 철저하게 의식한다. 밟을 필요 없는 주변 공간은 눈에 보이지만, 무관심하고 의식하지 않는다. 걷는 데 별 쓸모가 없는 땅으로 무시해 버린다. '밟는 공간'은 의식의 대상이고, 그 주변 '밟지 않는 공간'은 무의식의 대상이다. 걷기가 가능한 것은 겉으로는 머리가 의식하는 '밟는 공간'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밟지 않은 공간' 때문이다. 밟지 않는 공간이 없으면 걸을 수 없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밟지 않는 공간을 인지하고 걸음을 가능케 하는가?

사고력이 없는 '몸, 신체(Body)'다. 의식은 머리(뇌)의 인지 작용이다. 무의식은 몸의 인지 작용이다. 머리를 통한 의식이 사고와 행동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 같지만, 몸을 통한 무의식적 결정이 인지 작용의 70~80%를 차지한다고 한다. 무의식이 부지불식간에 의식적 사고와 행동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셈이다. 몸이 '밟지 않는 공간'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면, 머리가 '밟는 공간'을 인지해도 걷기가 불가능하다. '밟지 않는 공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데다 그 '밟지 않는 공간'이 없으면 균형을 잃어 서 있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밟지 않는 공간'은 지속적이고 안정적 보행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결국, 몸이 인지하는 무의식적 쓸모없는 공간이 머리가 인지하는 쓸모있는 공간만큼이나 걷기에 필수 불가결하다. 머리가 먼저 생각하고 몸이 뒤이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머리와 독립적으로 무의식적, 선험적으로 행동한다. 몸은 그저 비곗덩어리가 아니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논설위원

깊은 우물로 기어가는 어린애를 보고 나 몰라라 할 사람은 없다. 만사 제쳐 놓고 어린애를 구하기 위해 달려갈 거다. 이때 그 부모로부터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신망 기대 등 이득을 따지지 않는다. 몸이 먼저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조건없이 어린애를 구한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목숨을 걸고 구하는 의인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 몸이 나섰다.

의식적 행동은 빙산의 일각이다. 배가 침몰하는 것은 그 일각이 아닌 보이지 않는 빙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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