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몹시 추운 날 고슴도치 몇 마리가 모였다. 방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한곳에 모여 살자. 다닥다닥 붙으면 온기를 서로 더할 수 있으니까." 좋은 착상이라며 맞장구쳤다. "좌우로 밀착, 좌우로 밀착" 부산을 떨더니 곧이어 "앗 따가워, 따가워." 비명을 질렀다. 몸에 난 바늘이 서로를 찔렀기 때문이다. "좌우로 벌려, 좌우로 벌려" 떨어져야 했다. 가까이해서 온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거리를 두니 다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어느 고슴도치가 너무 추우니 다시 간격을 좁혀 온기를 나누자고 했다. 허사였다.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이합집산을 몇 차례 반복했다.

고슴도치들은 바늘에 찔리는 고통에도 온기를 느낄 것인지, 모이지 말고 그냥 추위를 감수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처했다. 이 상황이 바로 '고슴도치의 딜레마(Hedgehog's dilemma)'다. 독일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단편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대인관계를 통한 친밀감 욕구와 자율성에 대한, 즉 상처받지 않는 욕구가 양립 불가한 상황을 빗대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할까? 가까이하기도 멀리하기도 어려운 관계 말이다. 중국 월나라 구천이 춘추오패의 마지막 패자를 차지한 데는 부하 범려와 문종의 역할이 컸다. 어느 날 범려가 문종에게 은밀하게 말을 건넸다. "구천은 목이 길고 입이 튀어 있고 매 눈초리에 이리 걸음을 닮았소. 이런 사람과 어려움은 같이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나눌 수 없소. 구천이 그대를 죽일 것이요." 문종은 이를 무시했고 범려는 구천을 떠났다.

며칠 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구천은 문종에게 칼을 하사(下賜)했다. "그대의 9개 비책 중 3개만 사용해 나를 패자로 만들었소. 나머지 6개 비책을 사용해 왕위찬탈 우려가 있으니 그대는 죽어 지하에서 오나라 멸망을 위해 그것들을 써주기 바라오." 자결 명령이었다. '불가근불가원'의 유래다.

인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와 '불가근불가원'을 철저하게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신체적 불편과 사회의식의 약화, 경제적 부담이 따른다. 그렇다고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울며 겨자 먹기 식이다.

흔한 용어가 된 이 사회적 거리는 잘못 쓰이고 있다. 원래 사회적 거리는 계급, 인종, 성별 등의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친밀감과 근린의식 또는 이들의 척도이다. 하지만 코로나19 방역 대책인 사회적 거리두기는 '비말이 튈 수 있는 거리 2m' 공간적 간격을 말한다. 사회적 관계의 정도인 본래 의미와 시각적, 공간적 간격인 실재 의미가 다르다. 고로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ing)가 아닌 공간적(Spacial) 거리라 함이 옳다. WHO도 '물리적(Physical) 거리'로 표현할 것을 권장한다.

공간적 거리두기로 코로나19 감염은 다소 피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적 거리의 악화다. 이는 사람 관계나 공동체를 무미건조하게 만들거나 갈등 등을 유발해 사회구조를 취약하게 만든다. 공간적 거리두기에 따른 비대면 활동이 대세다. 귀성, 친목 모임, 회의, 축제, 졸업식 등도 피하고 옆 사무실 출입도 삼간다. 사회적 활동 범위를 줄이는 등 사회적 관계를 축소한다. 전화, 메일, 화상통화, 메타버스, 인공지능 등이 대면접촉을 대체한다.

이 같은 기계적 접촉은 정보 수여를 가능케 하지만, 대면접촉에서 오는 아우라에 대한 감응을 어렵게 한다. 의사소통이나 정보전달에는 몸의 움직임과 시공간적 상황 등 비언어적 요소도 한몫하기 때문이다. 공간적 거리가 멀어지면 신체적 만남이 줄고 그 강도가 약해 인간관계의 친밀도와 애착 등 공동체 의식이 약해진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공간적(사회적) 거리두기가 발효된 지 2년이 넘었다. 변이종 발견과 확산으로 거리두기는 계속된다. 이제 거리두기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람이 늘고 있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거리두기를 준수 또는 강화할지, 친밀도 유지와 강화를 위해 이를 무시 혹은 완화할지 고민한다는 얘기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논설위원

하지만 코로나19는 공간적 거리두기의 해체와 사회적 거리의 강화를 동시에 허락하지 않고 있다. 결국, '고슴도치의 딜레마'와 '불가근불가원'에 부닥친 상황이다. 이러다가 제각각 달아나는 두 마리의 토끼 중 한 마리도 못 잡는 낭패를 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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