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덕채 시인·도촌리 이장

지팡이를 짚고 지나던 어르신이 혀를 찬다. "이장, 풀약 좀 햐. 밭이 이게 뭐여."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괜찮어유. 고추만 잘 달리믄 되쥬 뭐." 내 밭은 풀이 많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게을러서 그렇다. 내 고추밭 앞에 있는 익재네 밭고랑에는 풀 한 포기가 없다. 그 주인은 부지런해서 그렇다. 그는 백전노장이고 나는 10년도 안 된 초짜 농부라서 그렇다. 나뿐아니라 풀 무서운 줄 모르고 덥석 유기농의 손을 잡았다가 마빡 터진 젊은이들이 참 많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우리 괴산군에서 하겠다고 선포했다. 참 대단한 일이다. 자랑스럽다. 나도 그 대열에 끼고 싶다.

우선 제초제 쓰는 횟수 줄이고 비료 대신 퇴비나 유기농 자재에 적응하면서 본격 유기농에 대비하련다. 하지만 요즘 들어 꿈자리 심란한 일이 생겼다. 농부의 마음과는 다른 위정자의 속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유기농업에 특화된 청정 괴산을 만들겠다고 비전을 교육하고, 방송에 나가서 의지를 다지는 고위 공무원의 모습을 자주 봤는데 자꾸 공장들이 들어선다. 우리는 유기농업군을 만들 것이고, 세계유기농액스포를 유치했고, 온 세상 농부들을 불러서 "농사가 블루오션이고 유기농이 답이다."라고 자랑도 해야 하는데, 농사를 지을 땅은 자꾸 줄고, 땅이든 물이든 공기든 유기농을 위해서 깨끗하게 지켜져야 할 것들도 위험하다. 유기농업군을 하겠다고 했으면 포커스를 농사에 맞추고 일관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현실은 엉뚱하다.

사실 힘없는 농부들이 지자체를 끌고 가는 머리가 될 수는 없잖은가. 머리 된 위정자들의 눈이 광어처럼 오른쪽을 향해 있고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가면 그가 가는 길은 술 취해 쓴 이완용의 필체가 될 것이다. 머리가 덜렁거리면 머리에 달린 몸통과 꼬리는 마구 흔들릴 수밖에 없다.

어지럽다.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 한단 말인가. 지금 비닐하우스 안에는 아침저녁 농부의 문안을 받으며 고추 모가 앙증맞게 자라고 있다. 장차 '괴산청결고추'라는 상표를 가슴에 달고 김장 시장을 호령할 것이다. 어느 농부의 비닐하우스에서는 괴산대학찰옥수수 모가 자라고, 누구는 절임배추로 풍요로운 금년 농사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분명 그렇다. 하지만 그 고추밭 배추밭 너머, 농부의 꿈 너머에는 불온한 혁명의 깃발처럼 말뚝이 박히고 공장부지가 닦여지고 있다. 손자처럼 귀여운 새싹이 돋는 가로수 허리에는 읽기에도 민망한 글귀의 현수막들이 펄럭이고 있다. 안타깝게도 농부들의 손이 쓴 것들이다.

정덕채 시인·도촌리 이장
정덕채 시인·도촌리 이장

이 봄, 농심처럼 순하고 황소처럼 힘 있는 공직자가 그립다. 광대에게 신나게 한 판 놀아보라고 하면서 요리조리 멍석을 잘라내고 멍석 밖에 사금파리를 깔아 놓는다면, 어느 광대가 신바람 나게 놀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농부에게는 넓고 깨끗한 멍석이 필요하다. 생쥐에게서 멍석을 지켜 줄 아부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금년에는 용기를 내서 화학비료 대신 비싼 유박 퇴비를 신청했다. 귀하고 사랑스러운 내 땅 에게 자극적인 양약 대신 맛난 한약을 먹여 볼 참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유기농업군 괴산의 순정농부이니까. 밖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린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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