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범욱 공사발전후원회 명예회장·(사)한국수필가연대 회장

사람들은 '시간이 돈'이라며 열심히 일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끝이다. 결국 '사람은 시간'으로 실존의식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구라는 시공에 투여된 인간은 서로를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언젠가는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으면 안되는 죽음이 선취 돼있다. 얼마 남지 않은 찰나의 여생이지만 성실한 삶으로 마감해야 하겠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이다. 한국수필의 정수인 피천득의 '인연'이라면 인연이랄까! 지인들과 어울려 글을 쓰며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시공을 좁혀가며 고운 정 미운 정으로 얼룩진 지난날이지만 제일 가까운 사람은 집사람이다. 세월엔 묘약이 없음에도 잘 버티며 햇빛이 잘 드는 창가의 화분에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는 것이 일과 중의 하나다. 이른 아침 집사람이 햇빛이 찾아드는 베란다 쪽으로 부른다. 학란이 꽃잎을 피우는 금시초문의 상견례다. 세 갈래로 갈라진 새하얀 꽃잎 위 사이에 보랏빛 꽃봉오리 왕관을 쓰고 자리를 틀고 뽐내고 있다. 그것도 다른 꽃대에서 솟아오른 꽃송이까지 두 마리의 학이 앉아있다. 한 쌍의 학이 무병장수하여 천년을 살아오며 금방이라도 하늘로 비상할 자세다. 피천득의 '수필'에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이나 하듯 학란에서 진수를 찾아내는 사랑의 기쁨 그대로다. 그러나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상은 보이지를 않으니 어디로 찾아 나서야 할지 망설여진다.

학란은 멕시코 브라질 등 중남미가 원산지로 양란이나 열대지방의 난은 꽃이 화려하고 무성하지만 향기가 없다. 그러나 학란은 진하지도 않고 그윽한 향기를 안겨준다. 집에 들어서며 학난의 그윽한 향기를 콧속으로 들어 마시니 피천득 '수필'의 또 다른 구절인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 같이 무미(無味)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라는 수필 문학의 깊은 경지를 깨닫게 한다.

학란은 붓꽃과 식물로 보기에는 일반 난초 종류와 다를바 없다. 오히려 위로만 훤칠하게 크다 보니 키다리다. 봄이 오면 이른 아침에 햇빛을 보며 꽃잎을 내민다. 한나절이 지나며 시들기 시작해 8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꽃잎이 말려드는 비운의 꽃이다. 단명하고 귀중한 이 꽃을 더 보기 위해 양지바른 창가에서 피어나는 꽃송이를 지지대로 받쳐 준다. 잠시 잠깐 만개했다 사라지는 꽃 한 송이를 보기 위해 일 년 내내 온갖 정성을 다한 셈이다. 뒤늦은 깨달음과 그토록 짧은 시간에 꽃이 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바심에 들락거리며 살펴본다. 오히려 피천득의 '청자 연적'처럼 파격적인 마음의 여유가 살아나는 순간이다.

이범욱 공사발전후원회 명예회장·㈔한국수필가연대 회장
이범욱 공사발전후원회 명예회장·㈔한국수필가연대 회장

무한의 영겁 속에 찰나의 순간을 지치며 되풀이되는 삶이다. 사람들은 관심과 애정의 대상으로 반려동물이나 식물을 찾는다. 동적 이기 보다는 정적인 면에서 식물이나 난이 더 좋다.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이심전심의 운치다. 꽃이 피어 만개하는 것은 사랑의 결실이다. 꽃이 진 자리에 새끼 학란이 뿌리를 내리며 움을 틔운다. 화분 갈이도 해주고 다른 화분에 새끼도 분가시켜 주어야 한다. 무한대에 영원히 반복되고 있는 삶의 영원회귀다. 지금도 지구가 돌며 가는 세월의 굴레 속에 아무도 모르는 한해를 기다리며 지켜보아야 할 세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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