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취업, 사업, 정치, 사회봉사 등 사회활동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할 때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 명함(名銜) 제작이다. 사람들은 사업상이거나 사교적 만남에서 통성명(通姓名)과 함께 명함을 주고받는다. 신분이나 위치가 내로라할만하면 자신 있게 권하고, 그렇지 않으면 주저하거나 건네지 않는다.

명함은 이름, 회사, 직책, 주소, 전화번호, e-mail 등 개인의 외적 신상 정보를 담고 있다. 크기의 기준은 없으나 보편적으로 가로 85mm, 세로 54mm이다. 신용카드 규격과 같다고 보면 맞다. 재질이 종이가 대부분이지만, 용처나 개인 선호에 따라 플라스틱 등 특수재질을 사용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명함을 '밍피엔(名片)'이라 한다. 대나무 조각으로 처음 만들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명함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알림은 물론 다른 사람과 구별 짓기를 통해 정체성(Identity)을 부여하는 도구이다. 사람의 이름 석 자처럼 말이다. 명함과 이름이 기능은 유사하지만, 이름이 태생적이며 고정적인 데 반해, 명함은 사회적이며 가변적이다. 명함은 사회적 관계를 원활하게 형성하는 요소이자 틀이다.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해 말문을 트게 하는 물꼬라는 얘기다.

사회가 복잡다단할수록, 다원화할수록 사전에 상대 정보를 알기는 쉽지 않다. 상대가 누구인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등 신상 정보를 신속하게 파악해 대화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는 점이 명함의 존재 이유다. 백지상태에서 만나는 상대방을 판단할 기준은 명함에 실린 신상 정보인 셈이다. 기본 정보 외에 과거 경력 등 많은 정보를 뒷면에 빼곡히 채우거나 사진이나 그림을 넣어 자신을 확실하게 각인하는 명함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명함이 자신과 상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믿는다. 정말 명함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함축해 담고 있는 본질일까? 명함이 실상과 부합하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것일까 말이다. 서로 헛것에 매달려 서로를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명함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오판의 우려를 범하지 않을까?

이름/명함의 허상(虛像)을 경계한 아주 오래된 일화가 있다.

장자 내편 소요유(莊子 內篇 逍遙遊)에 요(堯)임금과 허유(許由)의 대화가 실려있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려 달라고 허유에게 청했다. "선생(허유)께서 임금이 되시면 천하는 저절로 다스려질 터인데(夫子立而天下治). 청컨대 천하를 받아 주십시오(請致天下)." 허유가 답했다. "저에게 왕이란 이름을 가지란 말입니까(吾將爲名乎)? 이름이란 실재 것의 손님인데(名者實之賓也), 손님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吾將爲賓乎). 돌아가 쉬십시오(歸休乎君)."

'명자실지빈야(名者實之賓也)'. '이름은 실재하는 것의 손님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이름은 태생 후 부착된 고유 명칭이 아니다. 사회관계에서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를 말함이다. 허유는 임금 자리를 넘겨주려는 요임금의 요청을 단연 거절했다. 임금이란 옷(탈)을 입고 황실, 국가, 신하, 백성 등의 삶에 종속되어 산다는 것은 자신이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금이란 이름은 실재[본질]가 아닌 그 실재의 손님[허상]이어서 본질의 껍데기에 집착한 삶을 원치 않았다는 얘기다.

이름이나 명함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개인에 부착된 이름/명함이 개인의 사유와 행동의 굴레를 설정하는 데다 삶이 계속되는 한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인에게 부착된 이름/명함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 사회관계에 종속, 심지어 노예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편과 가장으로서, 고용주로서, 노동자로서, 채무자로서 등 자신의 지위와 신분, 즉 이름/명함은 정체성을 확립한다. 정체성 확립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 하는 사람인가를 공인(公認)하기에 그 역할을 준수해야 한다. 그 역할 준수는 그 지위에 대한 복종이다. 복종은 그 지위에서 벗어나는 사유와 행동을 금지 함이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논설위원

생물 유기체적 개인은 타자와 관계에서 사회 유기체적 인간이 된다. 사유와 행동의 기준은 자신보다 그 자신의 대상을 우선시한다. 개인의 본질은 사라지고, 타자가 부착한 본질 너머의 명칭(이름.명함)이 주인이 되는 셈이다. 그 주인의 지시대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수동적 인간으로 전락한다. 사회관계의 단초인 명함/이름이 존재하는 한, 그것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을 조종하는 독립변수들, 태생적 지위와 사회적 위치를 벗어버리고 무인도에 선 자신을 틈만 나면 사유해 보자. 바위 돌의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 아름다운 조각상을 빚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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