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내겐 낡은 가죽 가방이 있다. 어깨에 메는 끈 두 개 중 하나가 오래 전에 끊어져 고쳐 쓰고 있다. 그런데 끈 하나가 마저 끊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이것 역시 고쳐 쓰고 싶었다. 끈으로 무엇을 사용할까 하다가 쓰지 않는 천가방이 눈에 띄었다. 천가방의 손잡이를 가위로 오렸다. 그렇게 얻어진 끈으로 가죽 가방의 끊어진 부위를 매었다.

매듭이 이쁘진 않았다. 매듭의 이데아는 이쁘니까...낙천적이고 장난끼 있는 내게 그 말이 스쳤다. 매듭의 이데아. 불과 몇 분 전만해도 단 한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말이다. 그런 말 자체가 내 안에 없었다. 가위로 천가방을 오려 얻은 끈으로 낡은 가죽 가방에 대고 매듭을 지으면서 떠오른 말이다. 과장해 말하면 순전히 즉흥적 창작이다. 천가방을 찾을 때부터 즐거움이 일었는데 낯선 단어가 생겨나자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굳이 필요 없는 합리화로 도피하는 폼 잡으며 아직 노추에 이르지 않은 내 안의 수줍은 화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이 작은 해프닝을 페북에 포스팅 했는데 매듭의 이데아라는 말 다음에 이 문장도 적었다. 왠지 머쓱함을 표현해본 것이다. 이 문장 역시 지금까지 쓴 적이 없다. 이전에 끈 하나를 수선했을 때도 기분 좋았는데 그때의 기분도 상기데는데다 상큼함이 몰려오고 있었다. 역시 노동은 즐거움을 준다. 더군다나 창조적인 행위는 그것이 비록 유치하거나 저급하다하더라도 당사자만이 느끼는 기분이 있다.

이런 일은 내가 나이가 꽤 들어서 가능한 일이다. 내 삶의 어느 때까지는 생각조차 안했다. 가방이든 뭐든 고장나거나 낡게 되면 새 것으로 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던 습관이 이렇게 변한 것엔 살면서 겪게 된 경제난도 있다. 경제난은 실로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것에 눈을 뜨는 계기도 된다. 누가 내 가방 바라보지도 않을텐데. 바라보면 또 어때. 내가 뭐 잘못 한 거 있나? 기성품에 저렴한 수선이자 창조를 더한것뿐인데.

상큼한 오기, 오기라기보단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가방 끈을 매어놓고 바라보았다. 얼룩도 있고 시간을 나름 통과하는지 긁힌 자국도 많다. 그래서 더 정겹다. 얼룩은 안에 들었던 볼펜에서 잉크가 샜나 보다. 그래.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우연히 모이고 자국도 되고 멍도 되고 흔적도 되면서 기성품들의 숲 속에 바람처럼 흘러가자꾸나. 매듭의 이데아, 매듭 꽃 단 낡은 가방아.

우리는 기성품의 숲에 살고 있다. 어릴 적만 해도 누더기를 기운 옷을 나도 입었고 그런 친구들이 많았다. 언제부턴가 그런 풍경은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명품 주문도 있겠지만 대개는 기성품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백화점, 편의점, 할인점 하다못해 동네 슈퍼에서도 기성품 천지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기성품에 대해 일방적인 비판은 피해야 하지만 폐단도 있다. 손으로 만든 수예품, 집에서 대강 만든 물건은 기성품이 독차지하다시피한 시장에서 설 자리가 거의 없다. 그런 부조리를 품고 있음에도 그것만이 문화, 삶의 방식, 질서인듯 여겨지는 세상에서 본질 찾기, 작지만 의미 있는 반란 같은 느낌을 나는 받고 있다. 어찌 고장난 낡은 가죽 가방 이야기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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