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배기 어린 아이에게도 국가는 있어야 해"

오상근 선생 광복회 동지들과의 기념촬영(뒷줄 왼쪽에서 3번째)
오상근 선생 광복회 동지들과의 기념촬영(뒷줄 왼쪽에서 3번째)

[중부매일 송창희 기자]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라오스 태국 전선에 투입되기 전날, 운명처럼 삐라 한 장을 만났다. '임시정부로 오라'.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늦은 밤 뜻을 같이한 동료들과 우물가에서 만나 도망을 쳤다.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달리고 달렸다. 대나무 잎이 서적거릴 때마다 일본군의 각반 소리처럼 들렸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중국 중경 임시정부청사에 도착했을 때 청사 2층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았다. 할아버지의 갓 넣어두는 함에서, 고향의 향교 문에서 본 것이었다. 순간, 너무 감개무량했다. 눈물이 흘렀다. "세살배기 어린 아이에게도 국가는 있어야 해." 100세를 맞은충북유일 생존 애국지사 오상근선생을 만나봤다./ 편집자


 

일본 부대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

진천에 거주 중인 충북 유일 생존 애국지사 오상근 선생이 100세를 맞았다.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온갖 역경을 겪고, 광복군이 되어 애국정신 하나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21살 청년이 하늘이 내리는 최상의 복이라는 상수(上壽)를 맞은 것이다.

오상근 선생 100세 축하연 모습
오상근 선생 100세 축하연 모습
오상근 선생 100세 축하연에서 선물을 전달하고 있는 송기섭 진천군수.
오상근 선생 100세 축하연에서 선물을 전달하고 있는 송기섭 진천군수.


지난달 20일 진천의 한울웨딩홀에서 열린 100세 축하연에는 가족, 친지, 광복회 회원 등 70여명이 참석해 선생의 인생 발자취 영상 상영, 송기섭 진천군수의 은수저셋트 선물 전달, 가족들의 축하노래, 축하케익 컷팅 등 일편단심 나라사랑 정신으로 평생을 살아온 오 선생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1963년 대통령 표창·1990년 건국훈장

1922년 9월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에서 출생한 오 선생은 1943년 9월 일제에 강제 징집됐다. 진천에서 첫번째 징병 인원은 41명이었다. 이들은 트럭에 태워져 끌려갔다. 행군 중 쉴 때면 누가 오라고 하지 않아도 한국 사람들이 자연히 모였다. 일본의 총알받이로 잡혀온 청년들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거냐"라는 밀담을 나누며 서로를 의지했다.

중국 계림의 한 부대에 배치된 오 선생은 1944년 1월 인근에서 한국광복군이 활동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러면 우리가 거기를 찾아가자"며 동료들과 함께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했다. 그러다 중국인에게 일본군 간첩으로 붙잡혀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 중경에 도착한 이들을 처음 반긴 사람은 김구 선생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김구 선생은 아주 체구가 크고 얼굴도 무섭게 생기고 팔이 손에 다 잡힐 정도로 컸다. 김구 선생은 목숨을 걸고 광복군을 찾아온 청년들의 용기에 박수를 치며 반겼다.

오상근 선생의 광복회 활동 모습
오상근 선생의 광복회 활동 모습

이후 오 선생은 1944년 12월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치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의 신변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고, 미군과 함께 국내 진격작전 훈련을 수행하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오 선생은 이 진격 작전만 성공했으면 지금의 38선도 없고, 이북도 없었다는 아쉬움을 지니고 있다.

오상근 선생 진천군청 퇴임식
오상근 선생 진천군청 퇴임식

그리고 1946년 6월 고향인 진천으로 돌아와 1948년부터 1972년까지 진천군청 행정과장, 산업과장, 식산업과장 등으로 지역과 군민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진천신협 이사장(1985), 광복회 충북도지부장(1992~2000년) 등을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청와대를 방문한 오상근 선생
노무현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청와대를 방문한 오상근 선생
문재인 대통령을 초대를 받아 청와대를 방문한 오상근 선생
문재인 대통령을 초대를 받아 청와대를 방문한 오상근 선생

정부에서는 그의 광복군 활동 공로를 인정해 1963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담대한 마음으로 통 크게 생각해라"

오 선생은 첫 딸을 낳고 일본군에 징집 당했다. 딸이 엉금 엉금 기어다닐 때 갔는데 걸어다니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아내는 매일 어린 딸과 함께 '비행기야, 우리 아버지 태워와라, 우리 아버지 태워와라'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오 선생은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고, 증손주까지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오 선생은 손주들에게 '항상 나라를 사랑했던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오 선생을 모시고 있는 아들 오장환(71) 씨는 "아버지께서는 기력이 쇠했던 시절에도 나라 잃은 아픔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특히 젊은이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대한민국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오 선생은 2005년 뇌출혈과 노환으로 원활한 의사소통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지만 100세 노인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한 모습이다.

오상근 선생 100세 축하연 모습
오상근 선생 100세 축하연 모습

아들 오장환 씨는 아버지의 장수비결에 대해 규칙적인 생활, 규칙적인 식사를 들었다. 오 선생은 밥, 국, 채소 위주의 식사를 즐겨하고 특히 자장면을 좋아한다.

오 씨는 "아버지는 특별한 음식이나 운동보다는 대인관계가 원만하시며 담대한 마음으로 통 크게 사고 하시는 것, 의리와 강단 있는 성격이 건강의 비결이 아닌가 싶다"며 "사소한 일에는 이래라, 저래라 일체의 간섭이 없으시다"고 밝혔다.

이어 "아버지는 생사를 넘나드는 혹독한 시간을 보냈지만 광복군 시절이 아버지 인생에서는 가장 자랑스러운 시간이었다"며 "화목을 가훈으로 여길 만큼 집안이나 직장생활에서의 화목을 중시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며 사시는 날까지 건강하고 마음 편하게 지내시도록 잘 모시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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