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발굴 뒷얘기-101.청주 봉명동 유적 (3)

이번 호에는 봉명동 유적, 특히 Ⅳ지구 (책임조사원 차용걸 충북대학교 교수)와 관련하여 ‘역사박물관건립’에 대한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이에 관한 시말을 쓰려고 한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 유적은 그 범위가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발굴유적 내에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많은 유구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에 관심있는 학자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주 시민들도 무척 많이 유적을 방문하여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던 중 조사단장으로 유적을 돌아보던 필자에게 한 시민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이 많은 유적들이 없어지나요. 우리들 후손에게는 무엇을 보여주게 되나요. 아파트를 보여줄 건가요”라고 필자에게 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후 며칠동안 고민을 하였지만 박물관장의 임기가 끝나가는 즈음에 있던 일이라 우리 조사단에서는 처음에는 몇 개의 중요한 유구만이라도 인공수지(FRP)를 떠서 보존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청주시 당국에서는 이를 위해 남아 있는 예산을 집행하도록 흔쾌히 동의하여 주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청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았던 문화층의 연대가 5만 년 전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이렇게 청주의 역사를 새로이 쓰게 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이 자료는 지금 충북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뒤 필자가 청주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의 유적현장 방문을 맞아 유적의 전체 조사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된 것은 박물관장의 임기를 마친 뒤였다(1999. 3. 2).

이 설명회에는 청주시장과 함께 박연석 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많은 관계자들이 참석하였다. 필자가 “‘봉명동유적’ 특히 Ⅳ지구는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기에, 이 유적에 대한 보존문제와 함께 여기에 청주 역사(박물)관을 지을 것”을 제안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 어느 고고학유적보다도 Ⅳ지구는 ①신석기시대~조선시대까지 모든 시기의 집터와 무덤터가 통사적으로 같이 있으며, ②유적의 밀집도가 다른 유적보다 높고, ③우리나라의 최고(最古) 명문(銘文)인 ‘大吉’이라는 풍탁(風鐸)이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④박물관의 전시는 유물중심에서 유적중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 앞으로 이와 같은 유적을 찾기는 정말 쉽지 않을 것이기에, ⑤이제는 우리도 유적파괴에서부터 보존이라는 큰 차원의 방향전환을 통해 청주시민의 자존심을 세우도록 하여 보자는 이유에서였다.

그 뒤로 전통문화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던 박연석 시의회 의장(당시)은 신장호의원(당시 운영·총무운영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시의회의원들과 함께 버스로 다시 봉명동 유적을 방문하고는 여기에 박물관을 건립하자는데 의견을 같이 모으고 이를 집행부(청주시)에 강력히 제기하였다.

더 나아가서 약 100평정도 밖에 안되는 신봉동 백제 고분기념관의 설립예산도 같이 합하여서 더 큰 청주역사(박물)관을 세우자는 데까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봉명동 출신의 장기명의원(현 운영·총무위원장)이 적극 호응하고 앞장서서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에 힘입어 조사단에서는 새로이 충북대 박물관장이 된 강경숙교수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취합하여 시장실을 방문하고 Ⅳ지구의 보존과 함께 박물관 건립계획을 제시하였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유적파괴 우려 지역에 대한 ‘공사중지’ 지시까지 떨어져 박물관 건립계획이 즉각 실천에 옮겨지는 듯하였으나 그 후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시에서 파견된 박물관 건립 준비팀(?)은 실사 과정부터 필자를 참여시키지 않았다. 이 조사를 처음부터 단장으로서 주관하였고 박물관 건립에 대한 첫 제안자이며, 명색이 한국박물관학회장인 필자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였다. 그리고 그들이 한두 번 현장을 방문하였다는 내용을 전해 들었으나, Ⅳ지구는 결국 파괴되어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고(1999. 4), 봉명동에 박물관을 세운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후 신봉동 백제고분관이 소규모로 설립되었고 다시 건물을 확장하여 짓는다고 하여 공사부지를 구제발굴하였다. 그리고 구관에 잇대어서 새로이 전시관을 지은 것이 현재의 신봉동 백제고분관이다.

필자는 아직까지도 청주역사박물관이 왜 이렇게 묻혀야 했는지 그리고 당시 시정책임자들은 그 정도 안목밖에 없었는지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봉명동을 지날 때마다 자연스레 지난날에 있었던 역사박물관에 관한 일들을 생각하게 되어 가슴이 쓰리고 답답해 온다.

물론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었겠지만 그 당시 큰 결심을 하고 여기에 ‘청주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단초를 세웠다고 하면, 지금의 청주문화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 충북대학교 박물관장ㆍ한국 선사문화연구원장 이융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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