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요녕성 교구, 한국교회에 도움 요청

최양업 신부 첫 사목지

중국 문화혁명 당시 파괴된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인 개주 양관성당 터 회복 및 개발을 위해 요녕성 교구(교구장 김페헌 주교)가 한국교회에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다.

이에따라 한국 교회의 두번째 사제인 최신부를 성인품에 올리기 위한 작업이 본격화(본보 2005년 12월 10일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양관성당 터 회복은 물론 개발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요녕성 교구를 통해 대북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은 예수회(회장 박성구 신부) 권순기 본부장은 “김페헌 주교가 올해 공식 은퇴를 앞두고 개주 양관성당 터 회복 및 개발을 희망하고 있다”며 ’한국교회 주도로 최신부 현양비와 경당을 건립해도 좋다는 적극적 의지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양관성당이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843년 12월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주교 서품식이 이곳에서 거행되면서부터다.

이후 최양업ㆍ김대건 신학생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만주를 여행할 때 자주 이곳에 머물렀다. 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1854년 주교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기 전까지 약 10년간 양관성당에서 만주 선교사로서 활동했다.

최신부도 1949년 4월 상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그 해 5월부터 12월3일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약 7개월간 베르뇌 주교의 보좌 신부로 양관성당에서 사목했다.

양관은 요녕성 교구청이 있는 심양에서 요동 북단의 개주를 지나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나가점’이라 불렀다.

양관성당은 1838년 요동 대목구 설정과 동시에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베롤 주교가 1840년 건립했으며, 이때부터 만주의 남쪽 선교의 중심지가 됐다.

그러나 양관성당은 1960~70년대에 걸쳐 진행된 중국 문화혁명때 홍의병에 의해 전파됐다.

홍의병들은 대포를 쏴 성당을 허물고 벽돌 잔해로 그 자리에 인민학교 교사를 세웠으나 얼마 못 가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양관성당 터는 폐허로 변한 채 주민들의 축사로 사용돼 왔다.

1970년대 후반 종교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되면서 옛 성당부지 회복 운동을 펼쳐온 김페헌 주교는 1990년 후반 양관성당 터만 되찾아 폐교사의 지붕만 수리한 후 공소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성당 부지는 자금 부족으로 아직까지 되찾지 못하고 있다.

권 본부장은 "현재 대만교회를 방문 중인 김 주교가 귀국하면 개주본당 하 신부를 통해 한국교회에 양관성당 개발에 대해 공식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서한을 전달할 것'이라며 "최양업 신부 첫 사목지인 양관 땅 회복에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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