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강원도 원주의 외진 마을 회촌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박경리 선생이 일군 토지문화관에작가로서 체류하고 있는 내게 창 밖의 빗소리가 너무도 감미롭고 아련했다. 태풍 힌남노로 인한 피해 소식이 남부 지역과 제주도 등지에서 들려왔지만 내게 느껴지는 비의 맛은 달콤하기만 했다.

비의 맛에 잠기다가 페북에 포스팅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곧 주저되었다. 포항에선 주민 한 분이 실종되었고 대만에선 옥상의 천장이 날라가는 소식도 페북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상황에선 서정적인 감각이 흐르는데 같은 힌남노로 끔찍한 피해를 당하는 분들이 있는 상황에서 감각적 글쓰기 자체가 비윤리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게 와닿는 서정성을 음미하고 찬미함이 위험하고 자칫 폭력적이 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보이지 않는 곳들이 아주 가까운듯 리얼타임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리얼 타임의 효과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손가락 타치만으로도 지구촌 반대편의 일들을 소상하게 알 수 있다. 알고 싶은 정보가 있으면 금세 찾아낼 수 있으며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친구나 친척의 목소리도 바로 들을 수 있다. 그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오늘같은 상황이 되면 난처함도 생긴다. 내리는 비에 대해 느껴지는 감정을 주관적으로 쓰다가도 공연한 방해물이 생긴다. 그것을 방해물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도 그 당사자들로서는 모독적이기에 그런 말을 쓰는 것도 결례다. 그런 이중삼중의 분열과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더욱이 페친들의 포스팅엔 극심한 비 피해를 받은 분들에 대한 위로와 애도의 글도 있다. 내게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비의 달콤함에서 출발한 글이 애도마저 담기엔 글이 자연스럽지 않고 억지스러움이 생긴다. 애도의 글을 쓰자니 처음부터 그런 출발을 했으면 몰라도 감각적으로 시작한 글이 그렇게 비약되는데엔 작위성이 들어가기에 다소 곤혹감이 따른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센티한 마음대로 쓰는데도 이처럼 분열과 혼란이 생긴다. 공감, 공감각의 능력이 과연 어느 범주까지인지 가능한 최대로 넓혀야겠지만 인간 본연의 가슴의 한계, 뇌 함량의 한계도 있다. 그 한계를 넘어야 하는 피로감 속에 이기심으로 급회전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해가 된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절에 시골 마을에 초상 하나가 있어도 밤을 새우며 상주와 그 가족과 비슷한 동병상린의 눈물 속에 있었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그 측은지심, 연민, 긍휼은 본질 중 하나로서 여전히 실존하겠지만 열린 문화라는 기만적, 편리적 기제 등으로 인해 지나치게 확산되어 우리는 희석된 감정으로 체면 유지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힌남노로 인해 심장이 찢어지는 분들이 속출한 상황에서 경우가 잘 맞는 글은 아닐 것이다. 창 밖의 나만의 비와 저 먼 곳들의 사납고 폭력적인 바람과 비소식이 좁고 작은 나를 동시에 쑤셔대는 통에 다소의 혼란과 분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태풍과 비 난리에 시름하는 분들에 대한 위로나 애도는 물론 가슴에 있다. 그러나 이런 문명 비판의 글로도 나가도록 부채질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이러한 나의 불편한 모습은 극심한 비의 폭력에 희생되는 분들에게 송구함은 될지라도 이해는 받아야할 것 같은 마음이다. 우리 사회가 또달리 짚어나가야 할, 눈에 잘 띄지 않는 지점일 것이다. 내 앞에 내리는 빗물에 보이지 않는 곳들에서 내리는 빗물이 환각적으로 섞여 흐르는 느낌도 설핏 있었다. 이 시대의 비는 단순하지 않고 복잡성의 비애를 안겨준다. 이 감각의 혼란은 누구 탓일까. 무엇들 탓일까. 다양한 생각들로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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