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나인문 대전세종본부장

얼마 전 중·고등학교와 대학까지 같은 학교를 쭉 함께 다닌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수화기 너머로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로나19에 감염돼 변성됐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더니 이번엔 전화기가 아예 꺼져 있었다.

가장 친하고 소중하다고 느꼈지만, 수십 년 지기의 안부를 물어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안달이 났다. 서로에게 무심해도 그 마음을 알아주리라 착각했던 지난날이 고깝게 느껴져 등줄기에 찬바람이 휑하니 불어왔다. '친구(親舊)'라는 말처럼 오래도록 친한 사이라고 믿었지만, 그의 행방이 묘연하니 이슥도록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얼마 후 이번엔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실은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니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암수술을 했다는 암울한 얘기였다. 간의 절반이상을 절제하며 생사기로에서 남모를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쳤을 친구를 생각하니, 바쁘고 먹고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자주 만나지 못했던 지난날의 허상이 의뭉스러운 더께처럼 폐부를 짓눌렀다.

조선시대 백성들의 평균수명은 44세였고, 군왕들은 47세였다는 통계가 있다. 하지만 영조는 역대 군왕의 평균 재위기간인 19년보다 훨씬 긴 52년간 권좌를 지켰고,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82세까지 장수했다. 금주(禁酒)가 그의 영면을 늦춰 준 해법이라고 전해진다.

그동안 술을 끊겠다고 다짐했던 게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다짐이 슬퍼 외려 술을 더 퍼마신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일도 일이지만 남편으로, 아버지로, 아버지의 자식으로 사는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살이의 고단함은 술로 푸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사반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슬플 땐 술 푸는 게 상책이라고 믿었던 술 푼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신라가 포석정 술잔치 때문에 전쟁에서 지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꽃비처럼 주검이 된 것도 술 탓이라는 것을 알지만, 인간관계에서 술을 빼고 얘기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개똥같은 이유라면 이유다.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은 해질녘이면 단골 술집에 들러 '밥' 대신 '술'을 마셨다. 그가 시끌벅적했던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 석양도 술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에겐 술이 밥이었고, 술이 시(詩)였고, 술이 인생을 살아가는 낙(樂)이었다.

나인문 대전세종본부장
나인문 대전세종본부장

간(肝)이 쉴 시간도 주지 않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정작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안부를 잊고 사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친구의 건강을 바라면서도 또 마신다. 친구를 염려하는 핑계로 마시는 일종의 즐거운 자해다. 빛바랜 어둠을 술잔 속에 파묻으며 친구의 안녕을 바라는 것은 한마디로 '역설'이다. 우리들의 '소풍'도 머지 않아 종착역에 다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사람과의 만남에서 술을 빼면 그 자리가 즐겁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다. 한 집에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을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것은 '술'보다 '밥'으로 삼시세끼를 함께 하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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