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우리나라 현실을 100개의 개념들로 바라본 적이 있다. 지금은 관계를 청산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느 문화단체의 청주 대표를 맡고 있었다. 그 단체의 이사장으로부터 우리나라 현실을 100개의 아젠다로 정리해달라는 권유를 받았고 그에 대한 답변이었다. 100개를 나름대로 생각하고 만들어보자 우리나라를 보는 나의 시각이 보다 체계화되는 기분이었다. 하나하나 구체화해나가면 우리나라에 대한 색다른 창이 될 것 같았다. 지인 몇 분께 보여주자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말해주었다.

칼럼으로나 다른 형태로나 조금씩 써나가다보면 축적되어 책으로든 뭐로든 재탄생 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아젠다가 '가치의 전도'였다. 이번 칼럼에 어느 정도 써보려 한다.

가치의 전도에 대해선 그 사례가 넘치도록 많아 굳이 사례를 들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의미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든다면 돈일 것이다.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돈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 중시에서 돈 중시로 흐르면 일단 본말이 의심된다. 그렇게 말하기도 애매한 게 자본주의 태동 이후 자본주의에 속한 사회 자체가 돈을 사람보다 중시하는 풍조가 지배적이기에 그렇다. 제도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비판으로 윤리적으론 나아가기 때문이다.

전도된 가치의 세상이 현실이 된 세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도된 가치 체제에서 돈과 사람과의 균형이 적절하면 괜찮지만 현실은 그 균형이 깨져 있다. 물론 일방적으로 말할 순 없다.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옹호자 입장에서는 제도 자체가 시장과 공급의 균형 속에 잘 돌아간다는 입장을 취한다. 가치의 전도니 하는 윤리적 말이 들어설 자리가 아예 없다. 그 세계에서 가치는 가격으로 곧잘 치환된다. 어떤 도자기는 천만원의 가치가 있으며 고흐의 어떤 그림은 수백억원의 가치가 있다. 이처럼 가치에 대한 해석 자체가 다르기에 이야기는 다기적으로 흐르며 그것들이 수렴될 성격도 아니다. 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론 타당하더라도 현실을 지배하는 힘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 즉 권력이나 현실적인 것이며 인류 역사상 그 이질적인 것들은 늘 함께 있었다.

윤리적, 철학적으로 볼 땐 분명히 가치의 전도임에도 그 자체의 성립 여부를 놓고 분열되는 세상.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그러나 가치의 전도가 없단 말인가? 교육을 위한 대학이 자본에 먹히고 전통이건 장인들의 작품이건 돈으로 치환할 수 없는 가치들이 돈으로 치환되는 세상에서 가치의 전도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철학이나 윤리를 완전히 배제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이니 정의니 하는 말을 쓰는 자체가 논리적으론 타당하지 않다. 효율, 이기심, 수익률, 권력 그런 말만 써야 한다. 그런 것들 위주인 세상이니. 그런 세상임에도 굳이 윤리적인 어휘를 들먹이곤 하는 것은 그 어휘들에 깃들인 윤리성이나 진정한 가치를 근본적으론 부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 말을 레토릭으로 쓰면서 대중들을 속이고 자기 기만에 빠진다하더라도 그런 말을 버리지 않는 자체가 그러한 속사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가치의 전도라는 말은 돈에의 숭상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사회에서도 가능하기에 사회 전체에서 타당성을 얻는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그렇게 보편적으로 타당성을 얻는 가치라는 것이 뒤집혀 있음 역시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된다.

가치 전도라는 말은 이렇듯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사례들로 가득차 가치의 전도라는 말의 의미조차 퇴색된 우리 사회에서 전도된 가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우리 사회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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